나랑 결혼할 거예요?

by 저기요

결혼이라는 화두를 떠올릴 때마다 구남친2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구남친1이 1차 세계 대전이라면 구남친2는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내 연애사의 히틀러급 안타고니스트 구남친2의 등장으로 나는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렀다. 둘 다 3년을 만났는데 둘이 입이라도 맞췄는지 "난 네가 부담스러워"라는 멘트를 날리며 나를 차 버렸다. 이것들아, 내가 부담스러우면 그렇다고 사귀기 전에 말을 했어야지. 아니 애초에 사귀자고 들이대지를 말았어야지! 3년 만났는데 부담스럽다고 차 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니 응?

그들과의 연애사를 떠올릴 때면 #지금내표정


나도 사람인지라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땐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 구남친들과의 결혼 생활을 시뮬레이션해 보면 왓 더 f...쌍욕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다. 맨날 누워만 있는 내 남편이 그렇게 귀하고 또 귀할 수가 없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남편은 순하디 순했던 구남친들과는 정반대 성향이라 나를 힘들게 하는 면도 있지만, 한 가지 코어는 분명하다. 남편은 나보다 강성이다. 나는 남편을 지켜주지 않아도 된다.


나보다 멘탈 약하고 감성적인 남자랑 사귀는 건 아픈 사람 병수발 드는 것과 비슷하다. 결코 나을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어서 같이 있으면 늘 불안불안하다. 노약자석이 비면 내 다리가 아파도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처럼, 배려와 양보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착하고, 순하고, 멘탈 약한 그들과 가장 하기 힘든 건? 단연코 결혼이었다.


구남친2와의 트라우마 썰. 헤어진 뒤 연락할 일이 있어서 반 년 만에 만났다. 그는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오래 만난 사이라 다시 봐도 어색하지 않았고, 그리움과 편안함마저 느꼈다. 그 편안함이 운명적 사랑이라 착각하며 똥 싼 바지에 또 똥을 싸서 뭉개는 실수를 반복하는 게 그와의 연애 패턴이었다. 다시 사귀자는 말을 듣는 순간, 어렵게 끊은 담배를 다시 입에 문 기분이었다. 어떻게 끊은 담배인데...담배 연기가 폐에 한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두 번 당할 순 없지. 정신을 차리고 물어봤다. 이번에 다시 만나면,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 수 있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정말 가관이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 봤다는 거다. 배가 고프니 식당 가서 메뉴 주문할 생각만 하고 돈 낼 생각은 안 한 거였다. 야 이 한심한 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나를 대여만 할래? 나를 소유하겠다는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추호도 없구나. 그냥 접자. 너랑은 여기서 접는 게 최선이다.


결혼 앞에선 언제나 밍기적밍기적. 숙제 안 해놓고 등교 거부하는 아이 마냥 징징징. 추진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구남친들에게 나는 정말로 지쳤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부모님이라는 최강 빌런을 상대할 자신감이 부족한 남자는 애초에 만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좋아하는 감정과 자신감은 별개의 문제였다.


남편과 두 달쯤 사귀었을 때, 전화로 심하게 다투었다.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다. 나는 대뜸 "나랑 결혼할 생각 있어요?"라고 물어봤다. 만약 남편이 이 질문에 아래 보기에 있는 대답을 했더라면 나는 조용히 전화를 끊고 연락처도 지워 버렸을 거다.


1) 뭐?

2) 글쎄...

3) 좀 더 만나 봐야지


4) 내가 미쳤니 왜 너랑

-> 이것도 있지만 보기에 포함시키고 싶진 않다...


씩씩대며 싸우다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훅 들어온 질문에 남편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당연하지, 결혼해야지"라고 대답했다. 불안한 내 마음을 꽉 잡아주는 말이었다.


크으으.png 추진력 ㅇㅈ


살면서 참 많은 이성에게 끌렸다. 연애 감정은 내 삶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었다. 쉴 틈 없이 누군가와 데이트하고 썸을 타고 사귀었다. 이성을 좋아하는 건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 이성을 만나 사귀었지만 "당연히" 나와 결혼할 거라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편이 처음이었다. 그는 나에게 최고로 잘해주는 남자는 아니었지만(잠깐 눈물 좀 닦고)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남자는 아니었다.


결혼할래요?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남편과 결혼을 하고 싶었다.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었고, 그 사람의 소유가 되고 싶었다. 여자에겐 한없이 불리하고 남자에겐 구속과도 같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 안에 편입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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