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애가 지겨워

by 저기요

<비긴 어게인 시즌3>를 보다가 내가 수현이면 헨리 오빠랑 사랑에 빠지겠구나 싶었다. 나이 차가 10살이나 나긴 하지만 17살과 27살도 아니고, 21살과 31살인데 뭐 어때. 둘 다 음악적 재능 충만하고 어리고 예쁘고 하는 행동마저 너무 귀여워서 든 생각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소가 유럽이라서 더 그랬다. 유럽의 돌바닥을 걸으면 옆에 누가 있든 사랑에 빠지지 않을까. 괜히 나 혼자 들떠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요 근래 아줌마의 마음을 뒤흔든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다. 회사에서 문화 행사로 다 같이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을 보러 갔다. 클라이맥스는 조느라 놓쳐 버리고 영화 초반 주인공 피터가 짝사랑하는 MJ를 의식해서 하는 행동만 기억에 남았다. 비행기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문 앞에 있는 MJ를 보고 후다닥 다시 들어가서 몸단장하고 볼일 본 흔적 없애려 애쓰는 장면인데 그 장면이 정말 너무 귀엽고 풋풋했다. 나도 모르게 아후으응아응꺆!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후으응아응꺆!


부부라면 절대 화장실 쓰고 뒷정리는 안 할 텐데, 라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나왔다. 출산 후 뇌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감퇴된 건지 볼일 보고 물 내리는 걸 몇 번 깜빡했다. 맨 처음 남편이 제보했을 땐 너무 당황스럽고 창피해서 어쩔 줄 몰랐는데, 이후 같은 실수를 서너 번 반복하다 보니 "또 그랬네, 헤헤" 하고 어물쩡 넘어가 버리는 스킬이 생겼다.


우리 부부에게 화장실은 쉬러 들어가는 곳이지 다음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서로 이에 낀 고춧가루까지 공유하는 사이에 화장실 문 닫고 외모 치장하고, 다음 사람 생각하며 변기 닦고 이런 자상한 배려는 없다. 사실 참 편하고 좋다. 이런 게 결혼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영화 속 피터의 행동을 보고 가슴이 콩콩 뛰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신비로워 보이는 노력을 한 지가 오래돼서 그런 것 같다.


연애할 땐 신비함이 필수다. 상대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언제든 연애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 연인 관계가 영원할 것 같아도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걸(이별이든 결혼이든 결혼 후 이별이든)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언제 끝날지 몰라 더 귀하고 간절한 마음. 그게 연애가 주는 불안감이다. 연인과 싸우고 카톡 1이 사라지지 않을 때 똥줄 타는 심경. 다시 연락이 왔을 때의 안도감. 연애는 불안해서 매력적이다.


아줌마가 됐어도 풋풋한 연애 감정에 가슴이 설레는 건 여전하다. 그 풋풋함과 설렘의 이면에 불안감이 있다는 걸 너무 빠르고 선명하게 캐치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나는 불안감과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이 사람일까? 아니면 저 사람일까? 이성을 오래 만났지만 나에게 완벽하게 맞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딱 맞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얼추 맞는 그림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는 게 결혼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열심히 다듬고 맞춰나가는 게 현실의 결혼생활이었다.


임신 중일 때 요즘 힙하다는 망원동에 놀러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카페와 술집에서 짝짓기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찾고 여자는 남자를 찾는다. 그게 본능이다. 금요일 저녁의 망원동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가려던 빵집이 문을 닫아 주위를 헤매다가 인스타에서 자주 본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상기된 표정에 에너지가 넘쳤다. 웃음소리마저 경쾌했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보는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와 케익을 먹으며 어색해하는 건 나와 남편뿐이었다. 남편은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보다 어리고, 평일 저녁에 힙한 동네에서 밤늦게까지 놀아도 되는 사람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성과의 만남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


아니! 난 원 없이 해봤어!


지금 내가 최고로 행복한 건 아닌데, 늘 일상에서 잦은 불만과 피로를 느끼는데, 그래도 지금이 더 좋아. 짝이 있어도 불안하고, 짝이 없을 땐 조바심이 나서 미칠 것 같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이 더 행복해.


밤늦은 시각 카페, 술집, 집 앞, 한강, 공원에서 서로의 꿈과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실의 고민을 나누며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더 매력적인 이성으로 어필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나날들. 그 순간은 짜릿했고 특별했다. 하지만 그걸 다시 하고 싶진 않다. 짝짓기를 위한 탐색과 워밍업의 과정은 이제 정말 지겹다. 파일럿만 수십 편 찍은 기분이다. 그저 기대감만 고조시키다 끝나 버리는 영양가 없는 파일럿.


지금은 내 연애사의 시즌 3이나 시즌 4 정도 같다. 메인 등장인물은 바뀌지 않고 시즌8이나 9까지 쭉 이어지면 좋겠다. 수현과 헨리가 부럽지만, 피터 파커의 순정이 귀엽지만, 이건 어르신들이 과거 고생담을 아련하게 추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새로운 이성이 주는 설렘을 원치 않는다. 연애는 지겹다.


요즘은 양치할 때마다 남편 칫솔에도 치약을 묻혀 놓는다. 내가 하는 걸 보고 남편도 가끔 내 칫솔에 치약을 묻혀 놓는다. 흰 칫솔모에 연두색 치약이 올려진 걸 볼 때, 남편이 나를 배려한다고 느낀다. 지금 우리의 연애를 단 한 장면으로 묘사하라면 오늘 아침에 본 이 광경을 묘사할 것 같다. 우리의 연애는 지겹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나랑 결혼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