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 없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이 출장을 가서 이때 아니면 언제 유럽을 가겠냐 싶어 따라갔다. 전일정을 혼자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이 없이 나 홀로나 다름없는 해외여행이라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6개월 전 항공권을 끊고 얼마나 설렜는지. 날짜가 다가올수록 실감이 안 났다. 아이를 양가 부모님께 맡기는 게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아이가 없을 땐 내 여행 일정만 짜면 됐는데, 이제는 아이를 맡기고 찾는 일정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일주일 간의 여행은 무탈했다. 그런데 여행 기간 내내 마음이 크게 들뜨지도, 설레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단지 아이를 놓고 와서 느끼는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혼자 해외여행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아이를 낳은 뒤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결혼 전 혼자 여행을 할 땐 두 가지 큰 기대가 있었다.
1) 여행지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자!
2)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자!
여행지에서의 나는 평소의 나와는 달랐다. 어떨 땐 겁이 많고, 어떨 땐 대책 없이 용감하고, 가끔은 일탈에 빠지기도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방만해질 수 있었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연기한다는 생각에 취해 마음껏 흐느적거리고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이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치도 높았다. 여행지에서의 짜릿한 로맨스!(실제 경험은 없다...)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만남은 꼭 이성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여행지에서 대화가 통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내가 될 수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수도 없다.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은 점이었다. 어딜 가도 나는 "하은이 엄마"라는 정체성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유모차에 눈길이 멈추고, 외국 엄마들을 유심히 보게 되고, 육아용품에만 온통 관심이 쏠렸다. 아, 나도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진짜 엄마가 되었다는 걸 먼 곳까지 가서 진하게 깨닫고 왔다.
그래도 아이를 낳고 혼자 한 해외여행은 여러 면에서 고무적이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결혼 후 남편이 잘하는 분야는 완전히 의존해 버려서, 길 찾기나 외국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말았다(원래도 길치에 영어 못하긴 했다). 예전처럼 구글맵과 파파고에 의존했다. 할만했다. 예전만큼 큰 즐거움과 일탈은 누리지 못했지만, 전에 없던 뿌듯함이 있었다.
아이와 일주일 떨어져 지낸 경험은 홀가분함과 해방감도 주었지만 불안감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양가 부모님과 시차로 연락이 잘 되지 않으면 온갖 상상들이 나를 괴롭혔다. 아이의 안전과 건강이 늘 걱정됐고, 연락이 닿지 않으면 불안했다.
사실 아이는 나랑 있을 때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을 받는다. 할머니들이 나보다 아이를 백 배는 더 잘 보신다. 그래도 나는 엄마니까, 아이와 떨어지면 아이에 대한 걱정을 가장 크게 할 수밖에 없다.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생긴 것 같다. 아이가 주는 행복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책임감의 무게는 족쇄라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여행 기간 중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보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여행 내내 아이가 그리웠다. 아이와 함께한 일상만큼 지금 나에게 가치 있고 행복한 것은 없다. 그 일상에 치여 힘들고 눈물 글썽이는 날들도 많지만 말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우리나라가 참 살만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엔 아이가 있고, 우리 가족이 있고, 익숙하고 포근한 잠자리가 있다. 맛있는 음식과 훌륭한 치안과 엄청나게 빠른 행정 프로세스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를 낳고 한국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 남은 생을 이곳에서 대다수의 부모들이 그랬듯 아이를 키우며 복닥복닥 살아가겠지. 예전엔 변화 없는 삶이 무덤 같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큰 변화가 두렵다. 이렇게 부모가 되어간다. 예전의 나는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