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목숨을 걸었던 때가 있었다. 퍼주고 또 퍼줘도 계속 샘솟는 연애의 에너지가 내겐 있었다. 참 오랜 시간을 열렬하게 고백하고 성실하게 들이댔다. 과거의 나는 남보다 더 먼 존재 같다.
스물다섯 살에 서른 두 살인 남자를 만났다. 그땐 서른 넘으면 다 어른인 줄 알았다. 일곱 살이나 많은 그 남자가 나는 너무 대단해 보였다. 또래 이성을 만날 때와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여자를 다루는 스킬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와 사귀면 나도 왠지 더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마음을 줄락말락 1에서 3까지 보여줬다가 4,5는 건너뛰고 6으로 갔다가 다시 2 정도로 컴백하는 여우 짓거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나는 그 짓을 참 지독히도 못한다. 아우토반을 쾌속질주하는 레이싱카처럼 내 마음은 폭주해 버렸고 나의 대시는 폭망하고 말았다. 그에게 놀아났다고 하기도 참 뭣하다. 내가 먼저 판을 깔고 북치고 장구 치고 하다가 그가 판을 접었으니. 판이라도 그가 펴줬으면 덜 억울하기라도 했을 텐데.
00 님은 명품 가방 같아요 (실제 호칭은 '그의 직업 + 님'이었다)
제가 평소에 살 수 없는 비싼 가방인데
어느 날 초특가 한정 세일이 뜬 거예요
그래서 무리해서 할부로 질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가방이 오질 않네요?
판매처에 물어봐도 답이 없어요
그래서 너무 답답하고 슬퍼요
아현역에서 이대역까지, 한 정거장 거리를 함께 걸으며 나의 절절한 감정을 비유로 표현했다(그놈의 비유...).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그의 반응이 참 가관이었다.
"나영아, 그 가방은 애초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어."
이보다 더 간결하고 명확하게 상대의 심장을 때리는 거절이 또 있을까. '이성한테 거절당하며 이런 말까지 들어봤다' 콘테스트 같은 게 있으면 장려상 정도는 따놓은 당상이다. 그의 말 덕분에 빠르게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차였구나, 끝났구나, 멋진 성인 남성과의 연애는 내겐 없는 거로구나.
그 뒤로도 수많은 들이댐과 헛다리 집기를 반복했다.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학습에 의한 개선이 안 됐다. 좋으면 막무가내로 직진했고, 상대가 날 좋아하는 것 같으면 1초만에 도취돼 허점을 보여줬다. 누가 널 좋아하는 것 같을 때 좀 도도하게 굴 수 없겠니? 그게 어려우면 차라리 무심한 척이라도 해라 쫌! 고독한 하이에나처럼 술에 취해 비틀댔던 과거의 나에게 해주고픈 말이다.
연애가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었니. 대체 연애가 뭐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