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by 저기요

어제는 운이 참 좋았다. 주말에 캠핑을 갔는데 새벽에 비가 별로 안 와서 밖에 벗어놓은 신발이 안 젖었다. 아이가 아침도 잘 먹고 응가도 잘하고 무엇보다 집에 오는 내내 자주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지만 운전석엔 베스트 드라이버 남편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차가 안 막혀서 1시간 반 만에 집에 왔다. 럭키했다.


오후엔 홈플러스에 갔다. 통신사에서 받은 상품권 6만 원어치로 장을 봤다. 초특가 핫딜로 뜬 2990원짜리 치킨도 한 마리 샀다. 초특가, 핫딜 이런 걸 시도해서 성공한 게 처음이었다. 필요한 걸 다 사고 카드는 4천 원만 긁었다.


2990원짜리 치킨이라니! 롯데마트 6900원짜리 치킨은 치킨이라 하기도 뭣했는데 홈플 2990원짜리 치킨은 치킨다웠다. 맛있었다. 소소한 행운이 병렬식으로 나열되는 기분이었다.


저녁에 기분 좋게 맥주 마시며 닭을 뜯는데 거센 바람에 열어둔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세게 잠긴 현관문 손잡이가 안쪽 방충망 손잡이와 부딪히며 꽉 물려버렸다. 방충망 너머 현관문을 열 수 없었다. 집안에 갇혀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 당혹스러웠다.


1시간 가까이 방충망을 뜯네마네 경비 아저씨께 부탁드려 밖에서 현관문 비번도 눌러보고 별 짓을 다했으나 문은 열릴 기미가 안 보이고. 20도만 넘어도 헥헥대는 남편은 방충망과 씨름하며 땀 뚝뚝 흘리고 있고. 아이는 아이대로 찡얼찡얼~~ 내 머릿속은 '아 방충망 뜯으면 15만 원 + 현관문 번호키 때려 부수면 20만 원 = 약 35만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겠구나' 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뜬금없이 인디아나 존스 생각이. 미친 원시 부족을 만나도, 아나콘다가 출몰해도, 입꼬리 쓰윽 올리며 기지를 발휘하는 멋진 사람. 위기 상황에서 유머와 침착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실상은 반미치광이가 따로 없었다.


내일 출근 못하면 어쩌지, 어린이집 못 보내면 어쩌지, 방충망 망가지면 어쩌지, 드릴로 현관문 뚫어야 하나, 열쇠집 출장도 안 되고,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표정관리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


결국 친정 아빠 조언대로 119에 신고했다. 이 와중에 남편이 119는 위급할 때만 부르는 거라며 "바쁘실 텐데 죄송하다"라고 해서 나도 모르게 샤우팅 할 뻔했다. 지금 정말 위급하거든?? 이 와중에 남 신경 쓰는 건 제발 그만둬! 긴급상황에 부르는 게 119인데 뭐가 죄송해? 죄송 타령은 넣어두라구우!!!!!


119는 정말 신속 정확하다. 구급대원 분들이 능숙하게 문을 열어주셨고 두 시간 여의 현관문 해프닝은 관리사무소 & 현관키 업체와의 통화로 마무리되었다.


오늘 좀 괜찮은데? 잘 나가는 하루인데? 싶을 때 너무 도취되지 말아야지. 2990원 치킨을 얻었으나 119 출동했던 운수 좋은 날의 기록. 아프거나 다치지만 않으면 돼, 네 전화받고 신랑 쓰러진 줄 알았다 라던 엄마 말씀이 떠오른다. 나의 반미치광이 기질과 비난 본능을 다시금 깨달은 날. 인성 참 쯧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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