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career)에서의 정서(emotion)
어느덧 또 다시 찬바람이 불고 수능일이 되었다.
고3시절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날의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기에 수능과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지만 오랜 진로방황 때문에 안해도 될 경험을 곱절을 해가면 학력고사부터 수능까지 줄줄이 보아본 경험이 있다.
무엇보다 오늘 시험을 치른 40만명의 수험생들 한 사람 한 사람 .
그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디느라 정말 수고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EBS 교육방송을 켜놓는 이 시간 즈음이 되면 차오르는 기쁨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이들도 있을테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에 낙담하고 깊은 절망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느쪽에 서 있든 그간 정말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손을 잡아 주고 싶다.
나는 학력고사를 지른지도 어언 27년이 지나고 수능을 치른지도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왜이리 선명한지 오늘 아침부터 뻐근했던 목과 불편한 심기의 정체가 비로서 명확해 졌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감까지 느낀 하루.
학력고사를 치른 날 저녁무렵의 절망감을 기억해 내니... 오늘의 내 불안의 정체를 파악하고 말았다.
꽤 장기간 입시생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의 젊은 날.....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기조차 버거웠던 10대와 20대를 관통하던 숨막히던 답답함.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볼 겨를 도 없이 고 3이 되었던 시절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울 시간도 없이
무엇인가가 결정되어 버린 참담함까지...
해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괴로워 했던 나의 젊은 날이 온전한 생채기를 남긴채 기억 저편에 놓여있었구나...그런 자각이 들어 괴로운 하루였다.
뉴스에서 학생들이 교정에 나와 수능날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웬걸..나는 조용히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팠다.
20대 중반도 넘어 혼자 도전한 수능...
아무런 지지자도 응원자도 없었던 수험생의 시절.
예닐곱살은 어린 친구들과 함께 치른 수능.
조용히 도시락통을 꺼내들고 먹기싫은 밥을 먹던 순간.
철저히 외로운 상태. 그리고 먹어야 한다는 생각들
오전과 오후가 교차하는 시간의 부담감들
도시락에 담긴 엄마의 얼굴.
하나부터 열까지 떠올리면 울음이 날 것 같던 청춘의 시간이 나를 아프게 되돌려놓았기 때문이다.
마흔 다섯도 넘는 세월동안 아직도 입시의 기억은 나에게 큰나 큰 암울의 과정 , 그리고 아프고 못다한 이야기를 담은 기억이라는 생각에 내내 가라앉은 하루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대학입시는 하나의 과정
그리고 내 삶의 또 다른 플랫폼에 불과했던 기억인데
그 당시에는 나에게 대학 입시는
내 인생을 결판내는 하루
그것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일생 일대의 날
성공할 것인가 ? 아니면 실패할 것인가를 가르는 하루 라는 프레임이 존재하였다.
더 끔직한 것은
그런 판단 착오에 대해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현실 이었다
입시에 걸려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입시만 잘 보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라는 엄청난 오해.
미래를 담보로 현실을 견뎌내는 데만 골몰했던 청춘.
지나고 보니 안쓰럽고
또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 가만히 있기 힘든 하루를 보냈다.
얼마전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이 문장은 라이너스 라는 래퍼의 의 Man in the mirror라는 노래의 가사인데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놀랍도록 공감이 되었다. 좀 이상한 말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자극으로 오래 도록 잔상이 남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 ....너무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입시를 끝내고 ‘망했다’는 생각에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기대는 없으리라는 ‘절망’에
정말이진 2달 동안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좀비같던 내 청춘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무리 울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구나.
이걸로 끝이구나
점점 나빠지기만 하던 현실들.
그때 나는 입시의 실패자로써
자신을 자학하고 자학하면서
내 미래를 모두 비관적으로 그리는 잘못된 인지과정을 거쳐갔던 것이 틀림없다.
죽고 싶다는 생각.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을 것 같던 시간들.
인생은 이걸로 종쳤다는 생각.
더 나빠질래야 나빠질수가 없으리라는 확신.
깊은 바다의 저 심연까지 내동댕이 쳐 졌다는 확신.
더 가라앉을 것이 없을 것 같은 참담한.
그때의 나는 아마도 그런 모든 것들을 한움큼 안고
그 절망안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는 장래에 관한 시간 조망도 짧았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달리 생각해볼 기회를 주거나
나의 잠재력이 대해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내 강점에 대해. 혹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해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로상담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가장 아팠던 경험이
지금의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기만 했더라도
그 당시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잘 알 길이 없다.
이런 추억의 하루에
공교롭게도 강남 한복판에서 학부모 대상의 진로교육 특강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대 입시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진로교육에 대한 저항감일까? 왠지 나의 목소리는 조금 더 격앙되고 힘이 들어갔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겠지만
진로선택의 과정에서는 실패와 성공이 늘 교차된다.
그렇지만 실패의 과정을 통과하는 이와
그대로 주저앉는 이들은 분명히 차이가 있고
그 지점이 진로선택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노력을 했지만 실패할 수 있고
최선을 다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의 경험을 환영하고 원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겪어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 과정을 통과해 내었으면 좋겠다.
실패가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고
실패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야말고 진짜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대학 입시이든 취업이든
전직이든 재취업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실패의 시간을 견디고
또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 시간이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다면 좋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이런 실패의 시간, 자기 불신의 시간에 우리는
자신을 믿기란 너무도 힘들지만
진심으로 말하고 픈 이야기는 이 순간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할 때이며
우리에겐 근거없는 자신감이라도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의 사회는 불확실성의 사회, 어떤것도 확신하기 어려운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런 때에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혹여 일이 안풀릴 때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각오가 있어야만 한다.
최근들어 진로는 정서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아마도 불안한 사회가 가진 속성위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서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정서적인 안정은 타인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Bowlby의 애착에 관한 연구는 인간 발달을 관계의 과정으로 우리에게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시사하고 타인과의 좋은 관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애착 관계는 인간 발달의 핵심적 맥락으로, 유아가 양육자와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상호작용이 작동모델로 내면에 저장되어 관계에 대한 지식을 형성한다. 즉, 초기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불안정한 애착 모델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이후 상호작용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새로운 경험마저도 이미 저장된 관계에 대한 지식에 맞추어 왜곡된 해석을 하게 된다.
일반적인 심리치료는 초기 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내담자에게 치료 관계를 통해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상담자가 안전 기지(secure base) 제공함으로써 내담자가 자신의 표상적 모델을 재평가하고 재구성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담자의 관계에서 문제를 찾고, 상담자와의 관계를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 내담자는 상담자가 제공하는 안전감 속에서 중요한 대상과 맺고 있는 관계 방식을 탐색하고, 알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접촉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적·정서적·성찰적 과정을 통해 부인되어 온 경험을 통합하고 일관되고 안정된 자기감을 키우며 애착 유형을 변화시킨다. 이를 통해 내담자의 발달에 영향을 준 원래의 관계들보다 더 조율되고 포괄적이며 협력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애착 지향적인 심리치료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초기 관계가 안정된 것이었다면, 그 결과 우리는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게 반응하는 -즉, 생각하고 감지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융통성 있는 표상은 우리의 느낌과 함께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을 유연하게 형성하는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다. 한편, 우리를 형성하는 초기 관계의 두드러진 특성이 회피나 양가감정 혹은 혼란이라면, 이렇게 수정될 수 있는 표상들과 관련된 ‘반응 유연성’에 대한 우리의 역량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초기 애착이 우리에게 안전 기지에 대한 관계 경험, 그래서 내면화된 안전 기지에 대한 정신적 표상의 토대를 어느 정도 제공했느냐(혹은 제공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내면화된 안전 기지에 대한 이런 내적인 표상은 우리가 감정적인 평형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는데, 때로는 안정감을 높여 주는 애착인물과 꼭 실제로 가까이 있지 않아도 그런 대상과 상징적으로 접촉함으로써 평형을 회복하게 해준다. 우리가 이렇게 안심시켜 주는 내적인 존재에게 의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탄력성을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탐험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반면, 내면화된 안전 기지가 없을 경우 이런 탄력성은 결여되거나 줄어든다.
Bowlby(1988)는 정서
적 교류를 생애 초기 몇 년 동안 “우리가 가진 유일한 소통수단”이라고 기술하면서 ※ 감정(경험에 대한 정신생리학적 각성과 반응성의 포괄적인 범주)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안정된 정서의 근간을 통해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을 향한 탐색을 시작하고 전인미답의 영역을 탐험할 용기를 내며 설령 실패하더라도 자기를 돌보고 회복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 이런 좋은 부모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없다고 해도 그렇게 낙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따라서 진로상담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내담자가 경험한 최초의 관계보다 심리적 발달에 더 유익한 애착 관계를 내담자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는 ‘협력적 의사소통 촉진하기’가 수행한다. 협력적 의사소통은 긍정적 발달을 촉진하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의사소통 특성으로 대화를 포괄적으로 만들기, 적극적으로 복구 시도하기, 대화의 수준 높이기, 기꺼이 관여하고 함께 애쓰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를 포괄적으로 만들기는 내담자들의 주관적 경험에 접근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어떤 느낌이 드나요? “원하는 게 뭔가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와 같은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질문은 내담자들에게 최초의 관계에서 배제되었던 종류의 경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가 어렵다. 내담자들은 표정, 말투, 자세 등 비언어적인 형태로 이 질문에 답을 하므로, 상담자는 이 비언어적 신호에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그 다음은 적극적으로 복구 시도하기이다.
진로상담 과정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갈등과 균열의 복구에 상담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뜻한다. 상담자와의 절충을 통해 상담 과정엣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안전기지가 실제로 안전하고, 내담자가 기대했던 것과의 차이점과 실망, 항의로 인한 어려움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담자의 확신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으로는 대화의 수준 높이기이다. 내담자에 대한 진로 상담자의 믿음 정도와 관련. 내담자 자신이 믿고 있는 것보다 내담자가 좀더 느끼거나, 사려 싶게 생각하고, 타자와 연결감을 느끼거나, 주도적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진로 상담자는 지적 발판(scaffolding)을 제공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진로 상담에서 내담자가 말로 표현할 수 없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느낌을 진로 상담자가 내담자를 대신해 표현해 줌으로써, 내담자 스스로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성찰적 역량을 끌어올리도록 돕는 것이다. 대화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에는 내담자가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느낌을 분명하게 느끼고 대신해서 말해주기, 내담자가 좀더 깊이 느끼기 위한 여지를 제공하기 위해 상담자가 수용적으로 침묵하기, 상담자가 ‘먼저 말하고’ 느낌을 표현함으로써 대화를 개방적이며 감정적 수준으로 연결하기,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상담자의 노력을 내담자에게 알려줌으로써 정신화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등이 있다.
다음으로는 기꺼이 관여하고 함께 애쓰기는 직면에 대한 설명이다. 내담자에게 때로 공감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직면이 필요하다.
치료 관계는 실제 관계이기 때문에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담자의 파괴적인 행동을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내담자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상담자가 한계를 설정하거나 내담자의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내담자가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관계에서 분리될 수 있다는 안전감을 발달시킬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협력적 의사소통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내담자가 상담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상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내담자에게 상담과정의 낯선 규칙과 역할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진로 상담의 구조를 신비한 상태로 남겨두는 것은 내담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끝으로 분리와 중단, 종결에 대해 다루기는 진로 상담자와 내담자가 상담을 통해 새로운 관계 경험을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미해결된 상실 경험이 있는 내담자들은 상담자와의 일시적 분리와 돌이킬 수 없는 유기를 쉽게 구별하지 못한다. 상담의 진전은 내담자가 분리 때문에 겪는 고통이 점차 줄어드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는데, 분리에 대한 내담자 반응을 효과적으로 다루면 안전기지로서 상담 관계에 대한 내담자의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우리의 성찰적인 자기는 일반적으로 애착 인물을 안전 기지로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내면세계를 포함한 세상을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관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Diana Fosha(2003)가 제안한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객체라기보다 사람-즉, 우리 행동의 의미가 그 저변에 있는 느낌과 의도 및 신념으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존재-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며 조율해 주는 침착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또한 그 사람의 마음과 가슴속에(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 압도되거나 그것으로부터 차단되기보다, 그 경험과 함께 할 수 있다.
아동기나 청소년기에 이런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 능력을 지지해 주는 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환자들은 그들의 내적 경험에 의해 휩쓸려 버리는 상태로 혹은 그것과 격리된 채로 남아 있다. (출처: 애착과 심리치료 참고)
올해의 수능이 끝났다.
우리 자녀들은 힘들거나 괴로울 수 있다.
이럴 때 편안히 기댈 수 있는
과묵한 그늘같은 부모가 필요하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들의 마음에 조율하고 귀기울이는 한사람만 있어도
그들은 반드시 새로운 힘을 낼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절반씩 존재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는 데에는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들의 존재가 도움이 된다.
오늘 모두 정말 수고 많았다.
“ 크게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작게나마 위로가 될 수있다면 좋겠다.
이 손을 꼭 잡기 바란다. ”
지금은 그저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일지도 모르기에...
" 이것이 끝이 아니다. "
그 말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