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볼츠의 우연학습이론
일전 모 일간지에 취업난(2016년 2월 청년실업률 12.5%)이 계속되면서 취업을 위해 개명신청을 하는 20~30대가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취업이 너무 안 되다 보니 작명소나 점집을 찾아 이름을 바꾼다”며 “가정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개명신청자의 30%가 취업과 관련해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다. 운명이라도 좋게 하여 자신의 진로문제를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청년들의 삶이 신산스러워 내 마음도 무거웠다.
진로문제에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이때에 진로를 다루는 일을 하는 나는 종종 많은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해서 커리어 관련 일을 하시게 되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전공을 바꾸신걸로 아는데 심리학을 선택할 때 갈등을 없었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해 본다. 내가 지금과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이 길로 걸어오도록 작용한 것은 무엇인가?
의도된 것인가? 내가 목표로 했던 것인가?
대답은 물론 ‘ 노’ 이다. 내 인생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커리어상의 변곡점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각오를 하고, 목표를 설정하여 진로를 모색한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 꿈을 꿔 왔던 직업도 아니었다. (아쉽지만 꿈도 별반 없었고 뭘 해야 할지 방향성도 없었다)
특별한 진로경로를 계획해서 밟아온 것도 아니고 롤 모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심리검사를 했던 것도 아니고 진로상담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는 진로성숙도가 무척 낮았고 진로지도라는 말도 스물 다섯 살에 처음 들어보았다)
20대와 30대의 방황 속에서 헤매고 헤매다 우연히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명확한 꿈이 있어야 한다거나 진로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 듯싶다.
그래서 언제나 이 이론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주목을 끈다.
크롬볼츠는 진로선택의 많은 부분이 fortune (운)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운]이라는 단어가 진로관련 연구에서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학습이론가인 그가 내놓은 견해가 기존의 이론들과는 너무나 달랐고 무척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fortune (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진로탐색에서 fortune (운)이 우리의 진로를 결정한다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진로설계에서 운의 영향이 70% 이상이라면 운이 좋아질 방법을 찾는 수밖에 스스로가 할 일이란 거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진로문제가 있을때마다 많은 이들이 ‘점’을 보는걸까 싶기도 하다)
학습이론가인 크럼볼츠(John D. Krumboltz)는 진로선택과 진로발달을 학습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관점으로 보았다. 특히 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우연적 사건(happenstance)이 개인의 진로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였다. 한 개인의 진로발달 과정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우연은 진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우연히 발생한 일이 진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계획된 우연’이다.
진로상담자의 중요한 역할은 내담자가 탐색을 하도록 격려하고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고 새로운 학습을 촉진하도록 돕는 것이다. 진로상담에 관한 사회학습이론은 ‘행동은 타고난 정신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학습 경험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학습이론은 인간을 환경에 의해 수동적으로 통제당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스스로 환경을 통제하기 위해 분투하는 지적인 문제 해결자라고 본다.
이 이론을 통한 진로상담의 목표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직업환경 속에서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기술, 흥미, 신념, 업무 습관, 개인적 자질 등을 학습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진로상담자의 역할은 내담자의 학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변화하는 직업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내담자가 계속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10년 전에 성공했던 방식으로 지금 성공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상담자는 이전 방식을 고수하려는 내담자에게 새로운 것을 배워 더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직면시키고 확인시켜야 한다. 특히 21세기에는 불확실성이 긍정적인 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확실성으로 탐색을 촉진할 수 있고 새로운 학습 기회를 찾아 낼 수 있다.
실제 진로상담을 찾는 내담자들은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직장에서의 대인관계를 개선하고 싶거나, 승진에서 탈락된 억울한 감정을 풀고 싶거나, 가사와 직장일을 병행할 수 있는 방안을 찾거나, 은퇴 이후를 준비하는 등의 문제를 도움받기 원한다. 진로상담에 관한 학습이론에서는 이러한 내담자들에게 바로 원하는 것을 알려 주기보다는 스스로의 학습과정을 통해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과정을 이해한다면 크롬볼츠가 제안한 fortune (운)은 다분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체성을 강조한 개념으로 약간의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우연학습이론에서 진로상담의 기본가정은 다음과 같다.
① 진로상담의 목표는 하나의 진로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보다 만족스러운 진로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 것이다.
② 개인적 특성과 직업 특성을 짝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진로 관련 심리검사를 활용한다.
③ 탐색적 활동에 집중하면서 우연히 일어난 일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④ 상담의 성공 여부는 상담실 밖 현실에서 내담자가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우연이론에서 말하는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5가지 성격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호기심, 낙관성, 융통성, 끈기, 위험감수 5가지 요인은 자신에게 오는 우연을 어떻게 기회로 만들고 자신에게 필요한 진로설계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가를 시사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운이라는 요소가 마치 외부의 환경에 의해 예측할 수 없이 주어지는 행운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성격적 요인과 환경에 대한 자세를 통해서 운이라는 요소가 자신의 통제의 의해 기회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학습이론에서 시도해 보고 그 과정에서 배우라는 대 전제를 고려해 볼 때에도 우연의 중요성을 최소화할 것이 아니라 진로 상담 과정에서 그 중요성을 증가시킬 방법을 인식하고 찾을 것을 고려해야 한다.
Mitchell 외(1999)는 진로 계획에서의 우연의 수많은 예를 제시한 후, 그들은 진로 상담자들에게 다소 급진적 충고를 제시할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5가지 제안을 하였다.
① 계획되지 않은 사건들이 진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정상적이고 피할 수 없으며 바람직한 것임을 인정하라.
② 진로미결정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내담자들로 하여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을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계획적인 열린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하게 하라.
③ 계획되지 않은 사건을 새로운 활동을 시도하고, 새로운 흥미를 발달시키며, 옛 신념에 도전하고 평생 학습을 지속시키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도록 내담자를 가르치라.
④ 계획되지 않았지만 유익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행동을 주도하도록 가르치라.
⑤ 전 생애 진로 기간 동안 그들이 학습하는데 지속적인 지지를 제공할 수 있도록 내담자와 함께 하라.
우리가 생각의 전환을 통해 우연의 중요성을 최소화할 것이 아니라 진로 상담 과정에서 그 중요성을 증가시킬 방법을 인식하고 찾을 것을 제안하였다.
우연을 상담에 통합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진로 계획 방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혜에 정면으로 도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로 미결정은 잘못인가? “진로 미결정”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내담자가 방향을 찾도록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열린 사고의 옹호자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우연학습이론을 커리어에 적용해 본다면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개념에 대한 저항은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우연의 중요성에 대한 연구가 이미 시작되었고(Williams 외, 1998), 우리는 향후 몇 년 후 이 관점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이 생길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