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인가요?
결혼 전에 잠깐 일을 했지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자녀 양육의 문제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경력 상담을 하다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다가 자녀 출산 이후 어쩔 수 없이 경력 단절이 되고 그러한 공백기 때문에 재취업이 힘든 내담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
과거에는 홍보나 마케팅 혹은 해외영업이나 회계 관련 일을 했었지만 경력이 단절이 된 이후 십여년이 흐르고 나면 직업에 대한 감각도 희미해지고 복귀를 하려해도 왠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적극적인 구직 활동을 하기가 어렵게 된다.
게다가 주어진 현실적 여건도 어렵게 되면 그야말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거기에 더해 남편과의 갈등이나 자녀의 어려움 혹은 주변 관계에서의 갈등 혹은 경제적 어려움이 겹치게 되면 그야말로 이 과정은 우리에게 도전과제가 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와 같은 경력 상담의 호소 문제 뒤에 신체적인 증상의 문제로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머리가 아프다거나 원인을 알기 어려운 복통을 느끼기도 하고 온몸 근육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혹은 불면증이나 식욕부진, 심한 경우는 어지러움이나 가슴의 답답함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의 원인이 만성적인 우울감일 수도 있고 실존적 불안이나 현실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최근 만난 한 중년 여성은 굉장히 심각한 신체 통증을 호소하였다.
이름만 대면 거의 모든 이가 알 정도로 유명한 기업에 다녔던 그녀는 결혼 후 경력단절이 되었다.
결혼 직추 남편은 그녀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잘 키워주길 원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것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미련없이 하던 일을 접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결혼 후 10년 쯤 지났을 때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 그녀는 두 아이와 자신만 남은 상태에서 새로운 일을 구해야 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무가지에 나오는 식당일부터 가사도우미 등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대학졸업장이나 과거의 경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걸림돌 같아 학력을 숨기고 전화 영업부터 당장 일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모조리 찾아 다녔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 24시간을 짜내어도 서울 살이가 녹록치는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그냥 아줌마’로 살아온 세월이 15년인데 ‘누가 나를 써주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15년의 ‘그냥 아줌마 세월’이 아니었다면 유능한 영업 관리 사원으로써 능숙하게 제 몫의 일을 해낼 수 있는 잠재력 또한 갖고 있는 사람임은 상담중에 확연히 드러났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낮아진 자존감
표현하지 못한 분노
해결되어야만 하는 생계의 부담감이 버무려져서
그녀는 상담 시간 내내 줄곧 물을 벌컥 벌컥 마셨고
내 이야기에 조그이라도 심기가 거슬리면 체면이나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겨를이 없이 거침없이 쏘아댔으며
매주 온몸 근육통의 상황을 호소하였다.
경력상담을 하다보면 이러한 분노감에 상담자는 매우 놀라게 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 분노가 상담자를 향하는 경우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기업으로부터 일방적인 해고 조치를 당한 한 남자분들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분이 책상을 엎으려고 했던 일도 있었으니 상담자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꼭 필요한 부분이다. (아직 한국에는 상담자의 보호 시스템이 미흡한 편이다. 물론 내담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
대한민국 경력단절 여성의 진로 상담을 하게 되면서
한국인의 심정이나 우리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화심리에서 소개되는 ‘화병’이란 주제는 특별하다.
화병은 민간에서 오래 전부터 쓰여온 말이다. 화병이란 주로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상태로 , 화를 참을 때 화병이 된다. 과거에는 화의 발산이 어려웠기 때문에 화병이 생길 소지가 매우 많았다.
생활주변에서 자주 듣는 언어에서도 불과 관련된 언어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불통이 튄다’를 위시해서 ‘불호령’이나 ‘불벼락’에서부터 ‘화가 난다’ ‘심화가 난다’ ‘부화가 난다’ 썽이난다“ ‘천불이 난다 ’와 같은 화와 관련된 단어에서부터 ‘ 피가 끓는다’ ‘애가 탄다’ 애끓는다‘ 가슴이 탄다’ ‘ 가슴에 열불이 난다’ 에 이르기 까지 불기운을 상정하는 단어가 매우 많고 소위 병이라고 일컫는 병증에도 거의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들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화병의 증상으로 대표적인 신체증상을 살펴보면 주로 숨막힘, 한숨, 가슴뜀, 열기, 두통, 치밀어 오름 등이고 심리적 증상을 우울, 하소연, 불안, 의욕상실, 후회 등이다 이것은 거의 모든 화병 환자들의 공통된 증상 등이다. 화병에 대한 연구가 서구의 의학지식을 습득한 정신의학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이유를 크게 몇 가지 정리해 볼 수 있다.
1) 신체증상이 현저하다.
화는 감정적인 영역인데도 현저한 신체증상으로 표현되는게 특징이다.
2) 표현이 과장되고 강렬하다.
화의 속성 그대로 열정적이다. ‘ 오장육부가 썩어 내려앉는다. 억장이 무너진다.“등과 같이 온몸으로 호소하기 일쑤다.
3) 온몸으로 말한다.
문을 열어놓고 땀을 씻는 등 열기가 화끈거리고 한숨, 탄식 등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하다.
4) 말이 많다.
신세타령, 넋두리가 길다. 감정이 복받쳐 울기도 하고 한숨을 짓기도 하며 혹은 너무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심정이 어떠한지를 묻게 되면 ' 말로 다 할 수 없다‘ 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는 점 등이다.
한국문화권에서 화병에 잘 걸리는 사람들이 주로 참는 성격의 소유자, 참는 것을 미덕으로 알아야 하는 여자, 교육수준이 낮아 화를 원만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특히 40대 이상의 여자가 많고 농촌 출신의 기혼자 중에서 화병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사회문화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단초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서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자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으며 그들의 화에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화란 억울하고 분한 생각과 감정을 내재화하고 있는 불쾌한 감정 상태라고 정의한다. 억울하고 분함의 정도는 자신이 받는 주관적 피해의 크기나 피해의 회복 불가능성과 자책성 그리고 가해자의 의도성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정리해 볼 수 있다.
화의 불쾌감정이 일반적 욕구좌절이나 스트레스 또는 우울과 구분되는 것은 화의 감정에는 억울함과 분함이 갖는 특정한 고유질의 자기중심적 생각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화병에 걸렸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가 날 때 화를 내거나 화를 풀어버릴 수 있다면 화병으로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화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란 무엇일까를 살펴보면 화를 내 봤자 화를 토로해 보았자 어떠한 변화나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가 아닐까 한다. 결국 화를 낼 수도 풀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화를 참아야 하는 고통은 그 자체로 괴로움을 줄 뿐 아니라 화의 통제에 대한 능력을 악화시켜 격한 흥분 상태를 조장하는 감정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만성적 화병의 시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진단해 보면 화병이라 하면 우울이나 신체화 장애 혹은 불안증과는 사뭇 다른 복합적인 양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대개는 우울하면서도 신체적으로 고통스럽고 불안하면서도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는 복합 형태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병의 증상은 단일 진단으로 내리기 어려운 모호성이 있기에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새롭게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요약하면 화병이 문화결합증후군으로 볼 수 있는 점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사회 현상적 요인: 화병 특유의 증상들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중년 이상의 여성에게 많고, 교육수준, 사회계층이 낮다.
2)문제해결방안: 환경 변화를 통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자신을 그 힘든 상황에 맞추려고 한다.
3)갈등에의 방어기제: 참고 견디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며 억제를 쉽게 하기 위해 팔자 탓으로 돌리는 등 초자에의 투사, 체념등의 방어기제를 쓴다.
4) 독특한 신체증상: 전신반응이며 증상의 중심부위는 명치 주위에 몰려있다. 토속적이고 개인적인 증상 표현이 독특하다.
5) 자가 진단: 스스로를 화병이라 진단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그 원인 규명에서 여느 신경증과는 달리 정신분석적인 접근이 필요없다.
6) 기존 체계로서의 진단상 난점: 우울, 신체화, 불안 증후군을 주중으로 하고 있지만 증상 표현이 독특하고 복합적인 증상이 동시다발하며, 병의 경과 및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등 진단이 애매하다.
7) 치료적 난점: 증상이 절박하고 병이 만성경과에서 불구하고 치료가 체계적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게 내 팔자인데 누가 고칠것이내고 치료마저 체념하고 있으며 정 못견디는 경우 내원하지만 일시적인 정화효과일 뿐이며 증상에 따라 신경안정제를 써보지만 그 효과 역시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다.
8) 증상을 통한 대인관계;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동정을 유도, 조정하고자 하는 등 대인관계의 주요 수단으로 쓰고 있으며 그 필요성이 있는 한 ‘ 나아서는 안될 병’ 이다.
9) 한으로의 승화: 화병이 상당 기간 지속된 경우 환자들은 자연스레 한타령을 하게 되는 것을 흔히 듣게 된다. 처음엔 원한이 많지만 차츰 원한의 속성은 약화되고 나중엔 한만이 남게 됨으로써 화병이 한으로 승화되어 가는게 아닌가 추정된다. 한 이라는 개념이 화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리 공격적인 색채를 띄지 않는다는 것도 주의할 부분이다. 한국인들은 한탄스런 일이 있으면 ‘삭임’을 통해 공격적인 색조를 지워가는 독특한 승화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삭이는 과정을 통해서 화병의 원인과 한의 공격성이 치유되는지도 모를일이다.
좀처럼 희노애락의 정서 표현이 없었던 엄마에 비하면 아버지는 총 천연칼라의 색깔을 지닌 성미의 분이었다. 특별히 성질머리와 유난한 기질 때문이었는지, 정말로 화가 날 만한 이유들이 많았던 것인지 명확한 연유를 알기는 어렵지만 내 어린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 천불난다’ 란 말이다.
아버지는 흥이 나면 노래도 잘 부르시고 재밌는 이야기도 곧잘 해 주시는 분이시지만
어느날 심기기 불편한 날이면 온몸으로 천불이 난다는 ‘화’를 표현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노여움이 세상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잘 알기 어려웠지만 어린시절 노기 띤 아버지 음성만 들어도 우리 형제 4남매는 숨을 죽이고 각기 제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카랑카랑한 성미에 완벽주의자인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양반이었다.
젊은 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짊어진 평생의 멍에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싫다고 말하지 않았던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도회지의 신산스런 삶을 받아내었고 배우지 못한 가난한 동생들의 생계를 모두 돌보며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그 역할을 단 한번도 피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86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친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 7남매를 혼자 키우신 분이셨다. 30대 중반에 홀로 되어 졸망졸망 어린 아이들 일곱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한국인의 의식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유교적 가족의식이 심리갈등을 처리하는데 과정상에서 일본문화의 복수처럼 응징의 의미가 강하게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는 가족적 인륜의 체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원한이 한으로 승화 되어 나타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화병의 증상을 설명하는 단어인 응어리, 덩어리, 치밀어오름 같은 단어들은 소화 불가능성-구강기적 갈등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문화를 기반으로 화병을 고찰하고자 할 때에는 한국인의 심정이나 한국인의 자아개념 등을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나 정신분석학 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는 구강기적인 갈망과 관련된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여성들이 이유기 시절 부모로부터 어떠한 양육을 받고 자랐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연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할머니의 괴팍하리 만큼 종잡기 어려웠던 성미를 어린시절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욕구의 좌절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지만 현실을 개척할 힘은 없으며,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용인된 팔자타령은 그들이 자신의 삶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적응하게 만들어 주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참의미에서의 ‘자기 확신감’을 지켜주지 못한 환경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상담실에 와서 경력상담을 하는 과정은 마치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과 같이 힘들고 아플때가 많다.
분노에 맞서야 하고 슬픔에 매몰되지 않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로 상담자 들이 그녀들을 버텨줄 때라야 비로서 그녀들도 세상을 향해서도 당당히 버틸수 있게 될 것이다.
때론
당신의 몸이 마음에게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