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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기도 하고 안하고 싶기도 하다.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호연씨는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 했지만 대학 졸업 후 2년간 아이들을 가르친 것 외엔 특별한 경력은 없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 예뻐서 빨리 결혼 한 케이스’라고 하였다. 

여성스런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은 나이를 가늠키 어려웠다. 30대로 보이기도 했고 40대로 보이기도 했다. 일상의 소소한 잔걱정을 빼놓으면 크게 고민할 거리도 없는 나날이었다. 처음 그녀가 상담실에 왔을 때 접수 기록지에도 주요 호소문제는 없었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고 아이들도 무난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호연씨는 얼굴은 대개 무표정하고 간혹 큰 한숨을 쉬었다. 


‘저는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면 오전에 종일 집안 청소를 해요. 청소에 좀 집착을 한다고 할까요? 아이들 학교에서 오기 전까지 청소 다 마치고 조금 쉬다가 간식 챙기고 저녁 준비하면 저녁이죠. 매일이 그래요. 나름대로 애쓰면서 사는 것 같은데 일상이 재미가 없다고 할까? 뭐라고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녀는 청소를 2시간씩 하고 아이들 간식과 식사 준비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무표정하고 때로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남편도 합리적인 사람이예요. ..저한테도 신경써 주려고 하고요.’ 

‘남편분도 잘해주시고 결혼생활에는 큰 불만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최근 어떤 사건이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 라고 하자 ‘글세 잘모르겠어요. 저도 이 나이에 진로고민인지.....남편은 좋은 사람이긴 한데요....제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 이야기엔 그다지 대꾸를 안해요. 대놓고 반대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의견을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것도 아니예요. 그냥 대화 자체를 피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불쑥 한마디를 하는 거예요. 애들 잘 키우는 게 남는거라고... 괜히 나가서 일하면 고생만 한다면서요.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요.”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해보셨군요. ‘ 라고 하자 그녀는 몹시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만 ‘여행을 간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하면 무엇이든 하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일하는 건 왜 그런지 별로 대응을 안 해요. 제가 당장 어떤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도 일을 조금 해볼까? 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안하고 딴 일을 하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은 어떠세요?’ 라고 하자 그녀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저도 몇 번 말을 해봤지만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지 않더라구요. 동네 언니들과  여행간다고 하면 어디로 가냐? 잘 놀다 와라 하면서 관심을 써주는데 일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전혀 딴 사람 같아요. 얼마 전에도 한번 이야기를 했는데 직장 생활도 안 해 봤는데 마흔 넘은 여자가 어디 가서 일을 구하겠냐고 한마디 하더니만 방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기분이 나빴지만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들어 더이상 이야기를 하진 않았어요.’ 라며 말을 맺는다. 남편과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 듯 싶었다.      

그녀를 돕기 위해서는 무엇을 함께 해야 할까? 그녀는 자주 인상을 찌푸렸고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그녀는 지금 무언가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지만 큰 한숨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같았다. 

그녀에게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보기 좋다’, ‘충분하다’, ‘일하면 괜히 고생만 한다’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거다’ 라고 한들 그녀가 느끼는 결핍을 해결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에게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좀 더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이제 저도 마흔 네 살 인데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허무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독백처럼 들렸다.      

’어떻게 해야 진짜 저의 인생을 산다고 느낄 수 있나요?‘ 그녀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진짜 인생을 살고 있는데...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걸까?  호연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고 가족들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인데... 

이 작업을 위해서는 호연씨가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인식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 다음은 그녀가 자신이 가진 역량을 알고 현실의 맥락 안에서 소망과 욕구를 현실의 실현 가능성과 타협해 나가는 단계가 필요하리라. 운이 좋다면 그녀를 지지해줄 공동체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도 그녀의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다소 보수적이고 가정의 질서를 지켜가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편 때문에 호연씨가 일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열정을 인정하고 사회적 활동을 지지해 주지도 않았다. 나쁜 환경을 제공한 것은 아니지만 호연씨가 원하는 욕구에 귀를 기울이거나 격려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논의대상이 남편이고 남편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상담이 진행될수록 호연씨는 자기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이대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박차고 나가 어떤 일이든 할 자신이 있나?라는 질문엔 시원스레 답하지 못하였다. 답답하다는 호소를 여러 차례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답답한지 명확해 알지 못했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명확치 않았다. 

그녀는 어린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하면서 다소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신경이 예민한 어머니의 심기를 살피느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욕심껏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반듯하게 행동했고 남들이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찾아 순탄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결혼해서 남편 챙기고 아이들 키우며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것이 엄마가 기뻐할 일들이었다. 호연씨의 가정사를 듣다보니 현재의 그녀 모습이 잘 이해 되었다. 

대학시절 꿈이 현모양처였으니 꿈을 이룬 셈이었다. 이 과제들은 그녀의 일생을 지배해 온 생각이기도 하였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행복한 가정,      


호연씨는 자신의 권태와 싸우며 상담실에 찾아 왔지만 상담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가정생활과 남편 이야기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하면 뭐 하나‘ 하는 양가감정에 흔들렸다. 현실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매일 매일 자반 뒤집기를 했다. 게다가 남편은 호연씨가 일 이야기를 하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무응답으로 일관하니 양가감정만 부추킬 뿐이었다. “괜히 나가서 고생하지 말아라.“ 라는 메시지는 어린시절 엄마 눈치를 보면서 ’ 엄마 걱정 끼치지 말아라‘라는 메시지와 흡사했다. 

‘제가 남편 눈치를 많이 봐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오케이를 하면 마음이 편안한데 그렇지 않을 때는 꼭 죄를 지은 사람 같아요. ’ 

‘인간은 스스로 결심한 만큼 행복하다’고 하는데 호연씨에게 새로운 시도가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도는 호연씨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녀는 지금 현실적인 장애물이나 심리적인 어려움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배제되었던 것 때문에 괴로운 것인데 그녀가 얼마나 자각을 할 것인가? 아마도 성장 욕구를 인정해 주고 일하고 싶어하는 그녀를 응원해 주고 정서적으로 한 편이 되는 그런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닐까? 


때로 우리는 고난을 겪고 트라우마를 겪고 실패를 겪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나에게 기대를 갖는 사람이 없고, 성장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없고, 무엇인가 더 것을 이루어 내라고 엉덩이를 툭 쳐주는 사람이 없을 때 괴롭다. 

나도 내 한계를 알지만 주위에 어느 누구도 나에게 더 성장할 수 있어 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힘들때도 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성장할까봐 눌러버리는 환경일테지만.       

진로상담 과정에서 호연씨와 같은 내담자를 만나게 된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환경, 이만하면 좋은 부모, 이만하면 좋은 직장인데 본인은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 성장동기와 자기 실현의 동기를 간과할 때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나의 욕구와 갈망 그리고 내 인생을 자기의 것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자율성에 대한 갈망이 오래도록 점화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초조함일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그들이 얼마나 발전하고 싶고 얼마나 더 나아지고 싶은지........... 그 절실한 성장 동기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로 성큼 나서고 싶지만 어느 날은 뒤로 훅 물러났다. 뒤로 훅 물러날 때는 일을 하면서 겪을 수많은 치사한 일들을 상상하며 제법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동료들과 의견이 어긋나 대립이나 결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해야 하는 괴로움, 배신이나 이간질, 혹은 뒤통수와 같이 조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을 나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자면 타인의 무관심한 태도에 흔들리는 마음은 어쩌면 남편의 반대라기 보다는 호연씨 자기 확신의 부족이 가장 큰 장애물일 것이다. 


어린시절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욕구 따윈 늘 뒷전이었던 과거의 일들과 행복한 가정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안에는 타인의 승인에 매달리는 그녀의 나약함이 있었다. 그녀의 나약함이 상담의 주제가 될테지만 진로문제에서 만큼은 이 나약함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철학자 피터 비에리는 우리는 때로 불쾌하고 상처 주는 것들에게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일부러 무시하거나 미화할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불편한 감정과 대면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불편한 진실을 피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다고 하였다. 호연씨가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는 만큼 호연씨도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호연씨 남편의 말처럼 호연씨가 당장 취업을 하고자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호연씨가 무엇인가 자발적인 시도를 해본다면 좋을 것 같았다. 미술을 전공했으니 아동 미술 지도와 같은 영역부터 조금씩 시작해 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분야로 새롭게 배워 진출할 수도 있다. 공부가 필요하다면 대학원을 알아보거나 여성 기관에서 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낮은 급여와 불편한 취업 조건, 어쩌면 초라한 위치에 서서 자괴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작은 생채기들은 오히려 영광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주부로 살든 직장인으로 살든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면 호연씨는 지금처럼 무기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연씨가 직업을 갖기 위해 준비를 하겠다고 하면 가족들은 엄마의 부재로 힘들 것이다. 남편도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니 힘들테고 아이들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질 테니 짜증도 날 것이다. 변화하는데는 그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호연씨가 결정을 내린다면 그 다음은 그 결정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상담의 목표는 바뀌게 될 것이다. 이후엔 진로발달의 수준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될 수 있다. Hall이라는 학자는 진로발달을 탐색-시도-확립-숙달로 구분하였는데 길어진 수명과 평생 학습 시대에 탐색-시도-확립-숙달의 반복의 과정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하였다. 호연씨처럼 중년기에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경우라면 천천히 탐색의 시간을 잡아보아도 좋다.정해진 진로 발달의 단계나 시기란 더이상 없다. 오직 개개인마다 자신에게 맞는 진로 발달의 과정이 요구될 뿐이다.      


진로 상담자로서 나는 호연씨가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나? 라는 것을 파헤치기 보다는 이제는 과거의 부채감 때문에 이유없이 여러 사람의 눈치를 보던 과거의 자기를 떠나보내고 이제는 모범 답안이 아닌 무엇이든 써도 되는 여백을 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나가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아가다 머물 듯이 머물다 나아가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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