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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변신은 무죄

진로적응력(career adaptability)

Levinson(1978)은 [The Seasons of A Man’s Life]라는 책에서 중년기를 4단계로 구분하여 각 발달단계에서 이룩해야 할 발달과업을 설명하였다. 중년기 첫 단계는 중년기의 전환기(40세∼45세)로 성년기의 일을 마무리해 나가는 한편 중년기의 요령을 익혀가는 교량의 역할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젊음과 늙음의 내면의 상반되는 성향들을 처리해야 하며, ‘남성적’ 부분과 ‘여성적’ 부분을 통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중년기로의 진입기(45세∼50세)로서 새로운 인생 구조를 설계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이 단계의 발달과업에 성공적으로 다다른 사람들은 중년기를 인생에서 가장 충만하고 창조적인 시기, 자기 성격의 새로운 국면이 꽃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50세의 전환기(50세∼55세)로서 중년기 입문기의 인생 구조를 재평가하고 자아와 세계에 대한 탐색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며 다음 세대의 인생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중년기의 안정기(55세∼60세)로써 이 시기의 인생 구조는 중년기의 토대 구축을 끝낸 안정된 시기(김선화, 2012)라고 기술하였다.      


대학 학부시절에 처음으로 Levinson의 ‘인생의 사계절’과 관련된 이론을 접했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무지개 같은 발달단계의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인생의 대순환이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었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역할이 자연의 변화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변화하다가 60세 전후에는 편안하고 고요하며 다소 망중한의(?) 노후를 즐기는 60세 이후를 상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런 인간 발달의 전개가 틀리거나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는 많은 부분 새롭게 고민하고 적응해 보아야 할 부분이 생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두어 달 전 꽤 탄탄한 중견기업에서 은퇴를 한 61세의 내담자를 만나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 25년간 한 기업에서 회계 및 재무 파트 업무를 맡아 일했다.  

퇴직 후 약 4개월간의 휴식을 취하고 나니 슬슬 무료하기도 해서 중장년 일자리 지원 기관을 방문하여 전문 컨설턴트와 상담을 하였다. 막상 상담을 받아보니 61세라는 나이에 회계분야로 재취업을 하여 관련 전문성을 살리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민 끝에 젊은 시절부터 관심이 있었던 컴퓨터 관련 분야를 찾아보던 중 한국폴리텍 대학에서 디지털 콘텐츠 제작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8개월가량 교육을 이수하였다. 이 과정을 시작할 당시에는 컴퓨터 작업과 관련한 툴을 익히고 나면 웹디자인이나 웹 관리 업무 등을 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은 것도 사실이지만 과정을 듣고 보니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왜냐하면 디지털 콘텐츠 분야는 기술적인 면뿐 만 아니라 트렌드를 읽어내는 젊은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에 회계분야에서만 오랜 시간을 일해 온 A 씨에게는 도전적인 일이었다. 중도에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기왕 등록도 했고 그동안 몰랐던 컴퓨터 관련 지식을 배운다는 점은 괜찮은 것 같아 끝까지 마무리를 하였다.


퇴직 당시만 해도 회계 관련 전문지식이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싶었는데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구청을 찾아가 일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구청 내의 직업상담사를 만나 상담을 받고 이력서를 놓아두고 돌아왔는데 우연히 중장년 취업 아카데미 건물 위생관리사 양성과정이라는 홍보 메일을 받게 되었다. 건물 위생관리사가 뭘까? 자세히 알아보니 다름 아닌 빌딩관리 혹은 빌딩 미화 등의 일을 하는 업무였다.

A 씨는 일단 신청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거쳐 250시간의 과정을 이수하였다. 회계업무를 하던 사람이 미화 일을 한다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직은 신체도 건강하고 더군다나 미혼인 두 명의 자녀를 생각하면 향후 15년 이상은 더 일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이 과정을 통해 기회를 잡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수한 교육 태도 덕분에 A 씨는 청소용역 업체의 현장 실습을 거쳐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되었고 11개월간 미화일을 경험하였다.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이었지만 갈 곳이 있어서 즐거웠고 무엇보다 아직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 같아 기뻤다고 한다. 또한 과거에 했던 회계 업무의 능력을 살려 비품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서식을 만들고 청소용품 정리에 엑셀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관리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건물 미화원이라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과정 속에서 현재는 중간관리자로써의 비전도 품게 되었고 위생관리 분야의 전문성을 익혀 인사관리나 비품관리를 책임지는 직원이 되고자 하는 포부를 품게 되었다고 하였다. A 씨는 퇴직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꾸준하게 재취업 방법을 모색하고 일자리 기관의 전문 상담사들을 찾아가 구직의 동기를 호소하는 과정 거쳤다.

어떻게 그토록 자발적일 수 있을까 싶지만 이 분은 25년 만에 희망 직무에 맞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도 써보는 과정에서도 무척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로 상담자로서 나는 A 씨를 만난 이후 장기적인 커리어 설계와 성인기의 발달과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rikson(1963)의 생애 발달단계 이론에 따르면 성인이란 발달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발달과정의 한 상태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특히 중년기는 ‘7단계- 생산성대 침체성’ 단계에 해당되는데 생산성의 시기는 40세∼65세 사이의 장년기이다. 이 단계에서는 생산과 양육, 자손의 성취에 따른 만족감 및 인류 복지 등 차세대를 양성하고 인도하는데 주로 관심을 두는 시기라 하였다. 생산성 확립에 실패하면 개인적 욕구나 안위가 주된 관심이 되는 자기도취에 빠지고, 인간관계는 황폐해지고, 절망과 인생의 무의미를 느끼고 중년기 최대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현재 우리들의 장년기는 과거에 비해 매우 길어지고 있기에 생산성을 위해서 더 오래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기가 된 듯하다.      


또한, Jung(1954)은 중년기를 젊은 시절에 꿈꾸었던 인생의 목표를 성취했음 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취와 절정이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늙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죽음의 필연성으로 인하여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감을 느끼는 과도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고뇌 속에서도 지금까지는 외부에 쏠렸던 관심이 주관적인 내면의 세계로 쏠리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데서 흥미를 느꼈던 것을 종교적, 철학적, 직관적인 측면에서 흥미를 찾는 쪽으로 흐르게 됨으로써, 이전에 억압되었거나 소홀하게 대했던 자아를 찾게 되고 수용해 가는 개별화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성격발달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최옥채 외, 2011).

그러니 우리의 발달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고 중년기의 원만한 발달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환경을 조화롭게 통합해 나가는 것을 배우는 시기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장년기의 내담자 중에 이 분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시는 분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주어진 여건에 화가 나 있거나 왕년의 영광을 끊임없이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화려한 공로와 영광의 순간들을 말씀하실 때 중년의 남자들이 보여주는 열정과 몰입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인상적이다.

나는 상담자로서 그분들의 노력과 헌신을 진심으로 존경해 드리려고 한다. 하지만 변화하는 시대가 된 지금은 진로를 여러 번 설계해야 하고 인생 후반기에도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진로 적응력이 요구된다.


진로상담 분야에서는 1990년 대를 전후로 하여 기존의 상담이론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대안적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Parsons이후 많은 진로선택이론들은 대부분 이성의 합리성을 신뢰하며 충분한 양의 직업정보들을 수집함으로써 최적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개인에게 심어주었다. 이 이론들은 20세기의 논리 실증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서 진로 결정과 발달과정에 관련되는 소수의 변인(성격, 흥미, 적성 등) 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Bloch,2005; Pryor & Bright,2003).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부분의 이해를 통해서 전체의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는 직선적 인과관계에 있기 때문에 원인을 알게 되면 결과를 예상할 수 있고 결과를 알면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특성과 직업 간에 매칭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현대 사회 속의 우리는 퇴보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며 계속되는 선택의 과정 속에서 유연한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또한 개인에게 직업은 단지 생산성과 경제적 의미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자기표현이며 본질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을 진단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 많은 예외성과 더불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보완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였다. 인간의 행동은 결정론적인 원칙에 반응하기보다 스스로 선택에 의해 변화하고, 불확실한 환경과 개인의 상호작용은 진로선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실증주의적 예측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진로 이론들은 대체로 맥락주의적이고 사회구성주의적이며 복잡한 체제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 이론을 반영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고 있다.   

   

Osipow와 Fitzgerald(1996)는 “진로성숙도는 진로문제와 관련된 개인의 발달 정도와 수준의 지표이다”(p.114)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에게 진로성숙도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에, Super 등(1996)과 Savickas(1997)는 진로 적응도(career adaptability)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변화하는 직업세계와 작업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도”(Savickas, 1997, p.58)라고 정의하였다.

진로 적응도는 특정한 일이 자신에게 맞는 일일 수 있도록 자신을 그 일에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개인의 태도, 능력, 행동을 말한다. ‘변화’를 중요한 키워드로 하는 21세기는 직업 세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서 누구나 고용상태의 변화, 직업의 종류와 구조의 변화, 직무의 내용 및 요구되는 직업 능력의 변화 등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진로에서 성공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직업 세계의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의 적응력은 개인이 사회와 접촉하고 그 사회가 부과하는 과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스스로의 진로 관련 행동을 조절하는데 필요한 능력이면서 동시에 이렇게 자신을 환경으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진로 적응도를 통해 개인은 자신의 자아개념을 직업적 역할 속에서 실현해 내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진로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사비 카스는 진로 적응도가 발휘되는 장면에서 필요한 진로 적응도의 자원과 전략에 따라 4가지 차원을 구분하고 이를 각각 관심(concern), 통제(control), 호기심(curiosity), 자신감(confidence)라고 명명하였다. 즉 적응적인 개인은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미래에 관심을 두고 직업적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며, 자신이 가능한 모습과 미래의 일에 호기심을 갖고, 자신의 포부를 추구함에 있어 자신감을 키워나가는 사람이다.

적응력을 갖춘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예측하고 싶지만 예측이 불가능 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진로 적응력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자라는 이야기가  마음속에 맴돈다.

내 아버지의 변신은 무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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