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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몸, 그리고 키키 스미스

[1권][A모]

by E 앙데팡당

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가 발표되며 페미니즘 미술 비평이 시작되었다. 이 역사적인 시작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이라는 것에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너무 유명한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의 누드를 비판적으로 감상하는 방법을 주로 다루고 있다. 왜 명화 속 여성은 모두 벗고 있는지, 어떻게 그리 매끈한 피부로만 묘사되었는지, 왜 그들이 ‘비너스’로 대표되는 비현실적인 이름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보고 있자면 왜 진작에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어이없을 정도로 명화 속 여성의 몸은 적나라하다. 절대적 신이 아닌 ‘인간’에 집중하며 생동감 있는 인간상을 그리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렇게 정지된 여성을 생산해냈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티치아노/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 캔버스에 유채 /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틴토레토/ 수산나와 장로들/ 1555년경/ 캔버스에 유채/ 비엔나Kunsthistorisches 박물관 소장

전통적인 여성 누드를 분석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새로운 형태의 여성의 몸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누드와 몸은 다르다. 누드 nude가 가꾸어진 외형, 이상적으로 꾸며진 몸이라면 몸은 보다 포괄적이다. 철학자에 따라 몸에 대해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만, 이 분야에 가장 선구적인 철학자 중 하나인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몸’은 ‘비인칭적 실존과 인칭적 실존이 결합된 장소이자 발현’이다. 여기서 ‘비인칭적 실존’은 세계와 공유하는 삶의 부분으로서 몸이다. 즉 정신적, 물리적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칭적 실존’은 보다 사적이다. 삶의 경험이 쌓인 개인적 경험으로 구성된 몸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신의 몸을 느끼려면 세계가 내재된 몸을 수행하고 동시에 세계를 향해 자신을 일으키는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고 정신과 육체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가 곧 ‘몸’인 것이다.육체와 정신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정리된다. ‘몸은 안과 밖을 드나는 기묘한 존재로, 바깥에 있는 안의 것이고 안에 있는 바깥의 것이다’. 나에게 메를로 퐁티의 몸 철학은 신체 미술, 특히 애브젝트Abject를 연상시킨다. 애브젝트는 주체Subject와 객체 Object의 중간 개념으로, 주체의 일부가 떨어지거나 훼손되어 낯선 대상이 된 상태를 말한다. 이 낯섦은 필연적으로 생경함과 혐오를 유발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깎인 손톱, 발톱의 잔해와 배설물이 있다. 내 몸의 일부였던 부분이 떨어져 나가 타자화되었을 때 우리는 전과 같은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실제 작품으로 몇 예시를 더 들자면, 안드레 세라노Andre Serrano가 죽은 애인의 시체를 사진으로 찍은 작품이나 에이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가 유리병에 자신의 머리카락, 각질, 손톱 등을 나누어 담은 작품이 있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가는가?

안드레세라노 / The Morgue (Death Unknown)/ 1992/ Collection Lambert en Avignon/ © Andres Serrano.

유명한 미술가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작품은 애브젝트와 여성의 몸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오줌, 피, 내장 등을 여성의 몸과 함께 배치한다. 몸은 주눅 들어 보이기도 하고, 웅크려 있기도 하며 때때로 완전히 해체되기도 한다. 이 몸들은 이상적이지 않으며 성적인 어필 역시 없다. 같은 누드가 이렇게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나올 타이밍이다. 왜? 왜 애브젝트가 현대미술에 등장했는가? 왜 스미스씨는 오줌 싸는 모습을 만들었는가? 왜 사타구니 사이로 흐르는 피를 내보이는가? 왜 각종 내장을 하나씩 그려내었는가? 현대미술은 종종 난해하다는 불만을 받는다.(사실 모든 ‘현대’ 어쩌고는 거의 다 난해하다.) 그러나 미술뿐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 작품에서 난해한 현상보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이 난해함을 이해하려면 앞뒤 사정을 알아야 한다. 키키 스미스의 맥락은 전통 누드에 있다.


좌)키키 스미스/blood pool/1993 우)키키 스미스/tale/1992 사진출처https://www.boumbang.com/kiki-smith/

남성 예술가들이 꾸며낸 여성 누드와 키키 스미스의 작품을 함께 보자. 비너스, 오벨리스크, 이브 등 남성 예술가들이 여성을 그릴 땐 성적 에로티시즘을 강조한다. 8등신 몸과 매끈한 피부, 은근한 눈빛, 풍만한 몸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다분히 성적이다. 이 그림들에서 여성의 몸은 의도적으로 이상화되어 성적 대상화되었고, 비슷한 관객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여성을 향한 대상화는 그림에 그치지 않고 현실 여성의 삶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대상화하게 만들었으며 ‘이상적인 누드’를 향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었다. 여성은 외적인 기준에 목매며 스스로를 제단하고 억압했다. 수많은 혁명이 인류를 휩쓸 동안 계속 여성의 몸은 ‘성적으로’ ‘소비되었다’.


좌)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1863/캔버스에 유채/오르셰미술관 소장 우) 키키 스미스/pee body/왁스와 구슬/1992

이 벗은 몸의 전통을 전복시키기 위해 키키 스미스는 의도적으로 애브젝트를 여성의 몸과 병치한다. 이상적인 여성의 벗은 몸은 꾸며낸 에로티시즘을 드러내며 외면을 훑고 생김새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배설물 등 애브젝트와 함께 몸을 배치하는 순간 관객은 일종의 거부감을 느낀다. 벗은 몸에 낯선 느낌을 줌으로써 여성 몸을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시선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전통 누드의 문법을 거부한다는 건 기존의 성차별적 사회에 반기를 든다는 뜻과 같다. ‘차별‘이란 단어가 내포하듯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에 반항하며 몸에 매겨진 위계-낮은 위계로 설정되었던 배설물을 드러낸 것처럼-를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객체, 관찰 대상이 아닌 하나의 실존적 주체로 여성의 몸을 드러내고 기존 사회에 반하는 작품을 만들며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키키 스미스/ 트레인train/1992/캘리포니아 대학 미술관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타구니 사이의 피, 월경혈을 드러내며 여성의 몸이기에 체험할 수 있는 개인적 서사를 녹여낸다. 월경은 소녀가 성인이 되며 겪는, 변화하는 불완전한 몸의 개인적 경험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월경혈은 터부시 되며 ‘부끄러운 것’이 된다. 신체의 자연적 기능이 왜 부끄러운 것이 되어야 하는가? 붉은 피는 자연스러운 몸을 대변한다. 비너스와 같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여성상이 아닌 월경하는 무인칭의 몸은 여성 관객 개개인이 작품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게 한다. 키키 스미스는 벗은 몸보다 체액을 더 과장하며 관객의 시선을 거기에 묶는다. 작품 속 체액은 나체 여성의 몸보다 더 여성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개개인의 몸에 쌓인 강렬한 경험은 신체 밖으로 분출되며 영롱한 구슬로 이어진다. 키키 스미스의 ‘몸’은 나아가 말 그대로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고찰한다. 내장을 분해하거나 피부를 벗겨낸 조각상을 만들어 내부 신체기관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신체기관뿐 아니라 세포나 신경 체계를 추상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페미니즘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해석된다. 나는 키키 스미스의 작품을 메를로 퐁티의 철학과 함께 해석했다. 작품 속 여성의 몸은 개인적 경험을 내재하고 있는 동시에 관객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며 세계를 확장한다. 관객과의 관계 역시 재미있다. 관객이 가진 개개인의 특별한 몸의 경험에 따라 작품과 관객(또는 세계)의 관계는 공감이 될 수도, 반감이 될 수도 혹은 저항이 될 수도 있다. 키키 스미스의 작품 속 ‘몸’은 안과 밖, 개인과 사회의 경계를 허물며 몸의 실존을 내재화하는 동시에 발현하고 있다.작가는 14년도 한 인터뷰에서 "몸을 소재로 쓴 건 사람들에게서 사상, 정치, 경제 같은 인체 외부를 둘러싼 각종 사회적 관념들을 분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요즘은 자연, 동물에 관한 작업에 몰두해요."라고 밝힌 적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그 모든 사회적 관념을 내재하며 존재한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몸은 하나의 집약된 사회이며,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몸에 담긴 수많은 관념은 때때로 사회를 그대로 수용하여 다른 세계를 못 느끼게 만든다. 수많은 성차별적 누드화를 보며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몸의 실존을 느끼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몸으로 살아내며 몸이 던져진 사회를 다각도로 관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A모02, 20190408]




인터뷰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02/2014100200204.html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www.saatchigallery.com/aipe/kiki_smith.htm

참고문헌

몸과문화, 홍덕선 박규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참고웹사이트

http://artblog.damonjamesart.com/happy-birthday-kiki-smith/

http://www.artinsight.co.kr/m/page/view.php?no=8998#link_guide_netfu_89053_16079

https://www.boumbang.com/kiki-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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