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ost it

나혜석 작가: "여성도 사람이다!"

[1호][berry]

by E 앙데팡당

나혜석은 우리나라에서 서양화를 최초로 전공한 사람이자 서양화 화가이고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이다. 당시 유학은 좋은 결혼을 하기 위한 수단밖에 되지 않았고 나혜석도 유학을 다녀온 뒤 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 김우영과 결혼할 때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건과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는 따로 살게 해 달라는 조건을 내 세웠다. 이러한 약속을 받고 결혼한 나혜석은 결혼을 한 후에도 가부장제에 구속받지 않고 그림 그리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또한 나혜석은 문학가로서 뛰어난 작가이기도 했다. 「경희」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표현한 작품이고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문학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모(母)된 감상기」는 나혜석이 여성의 입장에서 최초로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 쓴 것이다. 나혜석은 이 작품에서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반발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나혜석은 독립운동을 했다. 남편의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서 상하이에서 만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과정(황옥 경부 폭탄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 도중에 최린과의 불륜으로 인해서 남편 김우영과 이혼을 하게 된다. 김우영도 당시 다른 여자와 서울에 살림까지 차린 상황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오직 여성에게만 간통죄에 대해 처벌했기 때문에 간통죄는 여성인 나혜석에게만 성립됐다. 이혼 후 나혜석은 이혼 과정에서 있었던 사회 불평등한 내용을 담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했지만 그녀만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나혜석은 화가이자 작가로서 사회적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급진적인 정조론을 가지고 “정조란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여성도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이것은 정조가 육체적인 순결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 취향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혼한 직후인 1932년 자신의 화실에서 작품 앞에 서 있는 나혜석

이렇게 나혜석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로서 삶을 살았지만 이번 글은 나혜석의 화가로서의 삶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그녀는 자수, 조화, 수예를 전공한 당시 다른 여자 유학생들과 달리 서양화를 전공한다. 이후 1921년에는 그 당시 조선에서 유화물감을 구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로서 최초로 전시회를 연다. 이 전시를 통해서 나혜석은 “서양미술사의 개척자로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장안을 들끓게 한신진 여류 작가 기염을 토하다”라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나혜석은 「이혼고백장」 발표 이후, 대중의 비난과 시댁에서 아이를 못 보게 하는 상황으로 인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수전증이 온다. 이로 인해서 더 이상 그림을 못 그리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관하던 창고에 화재가 나서 대부분의 작품들을 잃게 된다. 현재 나혜석의 유화는 40여 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출처와 소장 결로가 확실하지 않아 진위 논란이 많다. 이 중에서 확실히 나혜석의 작품으로 인정된 것은 「봄이 오다」, 「농가」,「자화상」, 「아이들」, 「무희」 등이 있다.

「봄이 오다」는 여인들이 봄나물을 채취하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을 원근법으로 그린 그림이고, 「농가」는 여성들이 농촌에서 일하는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나혜석은 이렇게 노동하는 여성을 그림으로써 당시 여성의 힘든 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내려고 했다. 또한 이 두 작품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여성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단절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 나혜석, <자화상>, 1928년 추정

나혜석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자화상」이다. 이 작품에서 나혜석은 자기 자신을 허구화된 인물로 그렸다. 얼굴은 움푹 파인 눈과 오뚝한 콧날로 그렸고 눈동자의 시선은 위쪽을 향하게, 경계는 불분명하게 처리했다. 어깨의 굴곡도 어두운 색채로 불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신체의 입체감을 들어내지 않았고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그렸다. 이러한 나혜석의 묘사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기 위해서 노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을 통해서 근대적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탐색과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얼굴을 서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취적인 서구 여성에 대한 동경을 담았고 모호한 성별 묘사를 통해서 자신이 여자이기 전에 남자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음을 표현했다. 1)

2. 나혜석, <아이들>, 1930년

나혜석의 「아이들」은 제목과 연관시켜 보지 않으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으로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이 작품은 나혜석의 첫 딸이 동생을 업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나혜석은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한다. “등에 업힌 아이는 마음에 들지만 아이를 업고 있는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말은 나혜석이 어머니의 모습으로 양육의 의미를 대표하는 아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나혜석은 신여성으로서 구 여성의 삶을 거부하고 진취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지향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모양처론에 입각 한 남성중 심의 사회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을 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살지 못하는 구 여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

3. 나혜석, <무희>, 1940년

나혜석의 인물화 중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 「무희」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남성들은「무희」에 표현된 신여성을 그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지만 나혜석은 이 신여성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남성의 시선에 복속되지 않는 당찬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성의 표정을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표현했고 다리를 드러내는 복장과 구두를 통해서 신여성의 활동성과 여성해방의 의미를 강조했다. 3)

나혜석은 그림을 그리면서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여성들의 목소리까지 대변했고, 여성들의 공감과 연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과거에 나혜석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화조>를 보면, 나혜석을 근대 개화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이 바람피우다 이혼을 당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으로 해석한다. 더 이상 나혜석이 추문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가 아닌 작품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00년이 지나서야 나혜석의 생각을 들을 준비가 됐다는 점에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대가 도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각주>

1) 이주경(2009), 「나혜석 문학과 미술의 상관성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pp 43-47.

2) 위의 논문, p49, 53.

3) 위의 논문, p51.




<참고문헌>

역사저널 그날 226회.

이주경(2009), 「나혜석 문학과 미술의 상관성 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사진출처>

검색어 "이혼한 직후인 1932년 자신의 화실에서 작품 앞에 서 있는 나혜석", 한겨레 21, http://legacy.h21.hani.co.kr/h21/data/L000117/1pbc1h03.html (2019년 07월 25일 검색)


<도판>

나혜석, <자화상>, 1928년 추정, 유화, 60 x 48 cm,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소장,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57794&mobile&cid=46702&categoryId=46753 (2019년 07월 19일 검색)

나혜석, <아이들>, 1930년, 캔버스에 유채, 제9회 조선 미술전람회 도록 흑색도판, 출처:「나혜석 문학과 미술의 상관성 연구」 논문

나혜석, <무희>, 1940년, 캔버스에 유채, 41x32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40224&mobile&cid=46717&categoryId=46765 (2019년 07월 19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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