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앙데팡당 Jan 17. 2020

박찬경이 구축한 다시 만난 세계

[E앙데팡당X아트렉처/보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박찬경의 전시 제목은 《모임 GATHERING》(이하 《모임》)이다. ‘모임’이라는 단어는 조직보다 느슨한 공동체이면서 개인들이 유대감을 형성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박찬경은 본 전시를 통해 잘 짜여진 세계를 구축하였다. 필자는 《모임》이라는 이름이 붙은 세계에서 박찬경이 던지는 여러 질문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관계 맺음’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필자가 전시에서 찾은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미술관은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인가? 미술관의 형태는 언제부터, 왜 존재해왔는가?

 - 서양중심적 주류 미술사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한국 미술사는 어떻게 쓰여 왔는가? 근대성, 역사, 전통, 한국성 등은 무엇이며 오늘날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가?

 -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재난이나 식민성의 잔재 등을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는가?

 박찬경은 직조하듯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정교하게 교차시켰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가져온 모티프는 민속신앙과 불교이며, 적극적으로 취한 형식은 액자구조이다.

 복선은 필자가 본 전시에서 가장 주목하는 요소이다. 전시 전체에 복선이 깔려 있다. 박찬경은 대표적으로 액자구조를 이용하여 작품과 작품 간 복선을 깔아 놓았다. 그리하여 작품은 다른 작품의 힌트로 작용하고, 서로 관계를 맺고 모여 유기적으로 전시를 구성한다.

 《모임》이 진행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제5 전시실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작품이 <작은 미술관>이다. 박찬경이 가벽을 설치해 만든 말 그대로 크기가 작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안의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액자구조를 이용하고 있다. 작가는 전시장 내 가벽을 두 줄 설치하고 22점의 이미지와 1점의 유화작품, 회랑과 병풍을 설치했다, 뿐만아니라 캡션을 직접 달았고 가벽에 창을 내어 물리적 액자구조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전시와 <작은 미술관>의 시작을 여는 <대나무 의자에 누운 사람> 옆에는 이미지 크기와 동일한 창이 뚫려 있는데, 이 창 너머로는 시멘트로 물결을 조각한 박찬경의 <해인>이 얼핏 보인다. <대나무 의자에 누운 사람> 안에는 파도가 그려진 벽이 등장한다, 이 파도 그림은 <대나무 의자에 누운 사람> 작품 자체에서도 액자구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해인>의 물결과 관계 맺으며 전시를 연결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이응노의 <군중>은 작가가 직접 수집한 근대 시기 병풍들과 연결된다. 또한 산신각은 본 전시의 중요한 모티프이며, 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듯 전시 마지막 작품 <제5 전시실>의 북두칠성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대나무 의자에서 잠자는 사람>

  박찬경이 전시에 모아 놓은 세계관을 들여다보자. 작가는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묻고 있다. 산신각은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을 모시는 불교의 전각으로, 민간인들의 기원의 장소이다. 작가는 산신각이 민간인들에게 미술관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산신당에서는 일상과 종교, 개인과 공동체가 만나는 곳이다. 결국 작가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역할 또한 산신각과 같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는 미술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작은 미술관>에 작가가 임의로 재구성해 놓은 미술사가 타당성이 없으면 없을수록 정통 미술사의 논리와 개연성을 의심하게 된다. 또한 <작은 미술관>에 속한 종친부 발굴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립 과정, 화재 사고와 사고 후 진혼굿을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담은 영상들은 <제5 전시실>의 미술관 공사 장면, 1/25 배율로 축소한 제5 전시실 모형과 대구를 이루어 미술관이라는 장소에 가려진 터의 역사, 근대성과 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강화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미술관은 가장 평화롭고 고결한 장소처럼 보이지만 권력자가 써 왔던 미술사, 지배자가 선택하는 ‘수집할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터는 조선 시대에는 종친부, 일제강점기에는 병원, 군사정권 시대에는 고문장과 정보기관으로 사용된 곳이다.

 이 사실은 《모임》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 재난으로 연결된다. 박찬경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역사는 외상적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억압된 사건들, 많은 경우 한국의 역사적 특정성으로 말미암은 구조적인 고통과 죽음을 낳은 일제강점, 전쟁, 분단, 냉전, 독재, 착취를 아우른다*. 여기서 그가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위와 같이 역사가이자 한국 미술가로서 작업하되, 셀프오리엔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1950년대의 김환기든 1980년대의 민중미술가든 21세기 비엔날레의 작가든, 모두 ‘한국성’을 과거에 가두고 현재의 것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 맥락에서 그의 전통 민간신앙에 대한 미술적 탐색은 즉각적인 ‘셀프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감내할 만큼 의미심장한 기획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찬경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약 전통적인 것에 대한 탐색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어떠한가? 아니 나아가 그 전통이란 것이 현재를 엄연히 살고 있다면 어떠한가?** 그리고 스스로 제시한 대답은 연작을 이루는 <늦게 온 보살>, <모임>, 그리고 <맨발>이다. 이들 역시 서로가 서로의 복선이다. 세 작품을 엮는 강한 내러티브는 불교의 곽시쌍부*** 고사다. <늦게 온 보살>처럼 현대의 재난(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을 고사에 대입해 영화로 풀어내기도 하고 반대로 <맨발>처럼 고사의 다른 요소들을 모두 배제시키고 두 발에서 나온 ‘쌍(雙)’의 의미만을 남겨 전통이라 할 수 있는 불교 사상을 기계적 오브제로 풀어내기도 한다.

 박찬경이 도모하는 한국 근현대미술사는 미술/종교, 미술/민속, 미술/귀신, 미술/일상, 과거/현재, 전통/근대, 예술가/무당 등의 온갖 식민지적 근대화의 이분법을 와해시키는 ‘연결의 제스처’다****. 그가 연결로 구축한 《모임》이라는 세계는 관람자들을 질문으로 인도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작품들은 낯선 소재나 재료가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공간,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역사, 익숙한 사건과 물건들이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일상세계에 녹아 있을 때는 익숙하기에 연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나 생각들을, 박찬경의 세계 안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에 그의 세계는 관람객에게 ‘다시 만난 세계’이다.



*신정훈, 「후기-식민 시대 역사가로서 미술가」, 『레드 아시아 콤플렉스』, 국립현대미술관/현실문화연구, p.22

**위의 비평문, pp.25-26.

***곽시쌍부(槨示雙趺):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 그의 애제자 가섭이 그 사실을 늦게 알고 관 앞에 도착하여 애도하니 석가모니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었다는 내용.

****박소현, 「작은 미술사, 거대한 뿌리」, 『레드 아시아 콤플렉스』, 국립현대미술관/현실문화연구, p.74.


<참고 문헌>

김항 외(2019), 『MMCA 작가연구2 박찬경 레드 아시아 콤플렉스』, 국립현대미술관/현실문화연구.

국립현대미술관(2019),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 GATHERING》 전시 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섹슈얼리티를 보는 방식, 누드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