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앙데팡당X아트렉쳐/A모]
미술에 종말이 있을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공공 미술관들이 휴관했고, 또 수많은 미술관이 폐관했다. 팬데믹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미술의 종말’은 몰라도 ‘미술관의 종말’은 가능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날 미술관은 물질적인 공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은 SNS와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지역별 미술관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온라인 콘텐츠 기획을 보여주었고, ‘문화역 서울 284’는 휴관 이후 관련 전시와 공연을 유튜브에 업로드해 접근성을 높였다. 많은 대안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미술관과 오프라인 전시를 원한다. 우리는 여전히, 실물을 원하고 있다. 최근의 전시들을 떠올려 보자. 모작과 영상, 체험 위주 전시가 증가하는 동시에, 해외 작가의 작품을 대여한 원본 전시의 관객 역시 꾸준하다. 두 전시에 가는 관객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멀티미디어 체험형 전시에 갈 땐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관객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영상이나 설치물과 사진을 찍으며 더 친근한 전시 감상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원화 전시를 간다면 촬영이나 전시 동선이 비교적 제한적일 테고, 관객은 작품을 눈에 한껏 담으며 조용히 관람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전시는 모두 관객의 필요 needs를 맞추고 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쁨의 수준에서 두 유형의 전시를 판단하기란 성급한 일이다. 원본 전시는 전시의 전통적인 형태이다. 왜 원본이어야만 하는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은 예술 작품의 원본에서 ‘아우라 Aura’가 생긴다고 보았다. 오로지 특정 장소에서 제한된 시간에만 원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품에 신성함을 부여한다. 어떤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감동, 감정의 변화, 혹은 대단한 무언가를 마주했다는 심리적 경외나 거리감은 원본의 아우라를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수많은 관객이 예술에 기대하는 지점이기도 하며, 미술관이 수많은 돈을 지불해가면서 해외 원본을 대여해 전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시대에서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원본 작품은 사진으로, 영상으로 복제되며 유일무이했던 작품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나아가 원본 자체가 없어지기도 했다. 디지털 사진이나 디지털 파일로 남은 영상 등은 무엇이 원본이다 말할 수 없이 복제된 사본과 원본이 동일하다. 어디서나 똑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면 누가 원본을 보러 미술관에 가겠는가? 원본의 아우라에 회의가 생겨나면서, 전시와 큐레이팅이 점점 중요해졌다. 벤야민은 전시를 ‘정신 분산적 오락’이라 말하기도 했다지만, 관객은 화려한 전시 문화에 열광했다. 대형 미술관의 자본과 작가의 작업이 만나 어마어마한 스펙터클을 관객이 경험할 수 있게 만들고, 미술관은 감상의 공간을 넘어 오락 amusement의 공간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테이트 모던이 유수의 작가와 협업한 ‘THE UNILEVER SERIES’*가 있는데, 개중에서도 카르스텐 휠러 Carsten Höller의 <test site>는 거대한 5개의 미끄럼틀을 설치한 작업이다. 휠러는 길고 조형적인 형태의 원통을 설치해 관객이 미끄럼틀을 타도록 유도하고, 이 구조물을 타고 내려가는 관객의 오락적 경험이 작품을 완성시킨다. 관객의 시각적 스펙터클과, 동시에 체험을 통한 내면적 스펙터클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다. 이처럼 현대미술 작가들은 스펙터클을 수단으로 삼아 전시장을 찾은 관객에게 매혹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이러한 스펙터클은 관객이 직접 미술관에 가야 경험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을 찾는 또 다른 이유가 된 것이다.
미술관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본인이 제시한 두 가지 이유뿐 아니라 아주 많을 것이다. 다만 미술관이 문을 닫아 관객 경험을 맺기 힘들어진 현재, 우리는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예술을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기술이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기술만능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으로 비추어질까 우려스럽다. 그러나 바이러스 이후 여러 미술관이 제공한 가상현실 투어 프로그램을 체험해보았거나, ‘파트타임 스위트’의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를 본 적 있다면 어느 정도 이 말에 동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 가상현실 투어는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인터넷을 통해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바 있으리라 짐작한다. 한국에선 국립현대미술관이 유영국 작가의 전시를 구글 Arts&culture 통해 볼 수 있게 제작한 바 있다. 전용 기계가 있으면 더욱 실감 나겠지만, 기계가 없어도 작가의 작품을 확대해가며 자세히 볼 수 있다. 핸드폰을 움직이면 그 각도에 맞추어 그림도 돌아가는 등 가상현실 구현이 잘 되어 있다.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는 16분 45초간 진행되는 360° VR 비디오로, 그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 있는 영상 작품이다. 관객은 전용 기기로 눈을 덮고 헤드셋을 덮은 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영상에서 체험자는 쓰레기 처리장에 내던져진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천장에 매달린 인형이 되기도 하며 드론이 되어 서울 종로 한복판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두 발이 땅에 붙어있음을 감각하는 동시에 높은 마천루의 꼭대기층과 눈높이를 마주하며 발아래 무수한 점으로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을 보는 모순적인 경험은 분명 일상적이지 않고, 요동치는 감정의 변화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속에 펼쳐진 세계를 보기 위해 필요한 건 20cm 내외의 박스면 모두 담을 수 있는 전용 기구들과 헤드셋뿐이다.
아직은 VR을 가정집에서 찾아보기 드물지만, 텔레비전이 그랬듯 VR 역시 점차 파급력이 강해질 것이다. 체험 카페가 생겨나고, 유튜브에서 몇몇 크리에이터들이 VR로 영상을 제작하는 걸 보면 기술의 진보가 일상에 스며들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상상력을 발휘해 가까운 미래에 VR이 보급되어 집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보고,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를 보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내가 원할 때, 심지어 새벽 3시에 내 침대에 누워 작품들을 몇 번이고 감상하며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과연, 미술관에 갈까? 물론 아예 안 가고 싶을 순 없을 것이다. 미술관은 작품뿐 아니라 공간이 주는 안정감도 크기에 미술관이란 물질적 공간이 아예 없어지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미술관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가 집에 있다면, 요즈음 같은 시기에 미술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기술이 공간의 대체재로써 훌륭히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금 기한 없이 시작된 미술관의 휴관에, 행복한 상상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더욱 가까운 위치에서, 더욱 개인적 공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관객 경험을 할 날을 오기를 바란다.
*영국 런던 현대 미술관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 turbine hall에서 이루어진 거대 프로젝트. 참고 심혜련『 아우라의 진화』, 이학사, 2017. 힐 포스터, 『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 ,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2. 검색어”파트타임 스위트”. 파트타임 스위트 2009~ 콜렉티브, http://www.parttimesuite.org/index.php?/17wmca/statement--work-image/, 접속일 2020. 0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