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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Mar 10. 2021

덩어리감을 잃어버린, 평면화된 신체에 관하여

[오리04]

 포스트 휴먼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책상에 앉으니 거의 노트북 화면 속에만 존재하게 된 '나'의 신체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화면으로만 사람들을 마주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주제를 변경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포스트 휴먼에 관한 이야기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 짐작해본다.    

    

‘접촉할 수 없는 몸은 인간관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연대의 강화를 외치는 시대에(어쩌면 연대의 강화가 필요한 시대에), 만날 수 없다면, 육체적 몸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줌(zoom)이나 구글밋(meet)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회의, 회식, 모임 등을 진행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모임을 가지고 나면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그래서 그 만남이 끝나갈 때 보통 ‘코로나 끝나면 꼭 만나자.’라는 말을 덧붙이거나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아쉬움을 전한다. 직접 만나 서로를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하며 관계를 형성해온 인간은 불가피한 비대면 상황에서 타인과 거리감을 느낀다. 아무래도 비대면으로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이 지속되는 이상, 그리고 코로나가 종식된다고 해도, 비대면 만남은 더욱 잦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비대면으로 타인을 만나고 관계성을 쌓아갈 때,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또 다른 형태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까? 그리고 육체성이 강조되던 인간의 신체는 어떤 변화를 맞이할 때, 그러한 관계 맺음 속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을까?  


몸 그리고 관계 맺음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ć의 <The Artist is present>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다양한 퍼포먼스 작품은 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관람객은 그의 몸을 매개로 사유한다. 관객이 의자에 앉아 작가를 마주 보게 되는 이 작품은 특히나 짧은 시간 동안 관객과 작가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한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음에도 그의 시선은 누군가에겐 영감을, 누군가에겐 위로를 선사했다.  

<The Artist is present>, Marina Abramović, 2010, Performance / 출처 : MoMA 홈페이지

‘예술가가 여기 있다.’로 해석되는 작품의 제목은 작가의 작품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성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겨진 것을 설명하기에도 적합하다. 마리나의 작품에서 작가와 관람객은 서로의 몸이 존재함을 눈으로 인식하고, 단순한 인식을 넘어 직감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양감의 덩어리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 순간은 곧 인간 대 인간의 유대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비대면의 상황에서 새로운 유대감과 연대감을 쌓아 나가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의 덩어리를 직감할 수 없다. 



 ‘덩어리감’을 잃어버린 평면 신체와의 관계 맺음을 사유할 때, 평면의 회화 작품을 마주하는 일을 떠올려 본다면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치 작업이나 퍼포먼스 작품보다 회화 작품 앞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감각할 수 있는 요소들이 시각으로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이 그려진 구상 회화의 경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인물에게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이런 경우 그림 속에서 혹은 그림 밖에서 인물의 서사를 찾아 나서거나 관람자의 삶에 있었던 유사한 경험을 인물에 대입한다. 인간은 이렇듯 다른 차원의 존재로 만났지만 그런대로 그 대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림 속 요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비대면 만남이 잦아지는 시기에 회화 – 인간의 관계 맺음을 인간관계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회화가 인간에게 그렇게 존재해왔던 것처럼 우리도 충분히 깊이 있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회화의 만남보다 적극적이며 상호 소통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평면화된 신체의 시대가 도래하여 회화적 관계 맺음을 구축해 나갈 때, 이 덩어리진 신체는 도대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걸까? 


 진정한 관계 맺음이 평면화된 신체를 매개로 행해지려면, 신체가 평면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평면화된 신체에서 덩어리 신체를 소환해낼 수 있는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덩어리 몸은 단순한 매개물이 아닌, 상대방을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핵심 요소였던 3차원 몸을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과 인지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되는 장이 되는 것이다. 2차원의 평면 속에서 분명하게 실존하는 몸을 3차원의 덩어리진 신체로 소환하는 것, 이는 화면으로만 마주해야 하는 팬데믹 시대의 만남 그 속에서 ‘우리’라는 연대감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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