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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Mar 10. 2021

비너스 2021

그루잠[05]

몇 년 사이 '힙'이라는 단어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개성적으로 보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조차도 유행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고 유행은 이들이 이상적으로 여기게 될 형태인 '비너스'로 관심을 모은다. 현대인들의 비너스는 매체 속에 등장하는 모델들이다. 저명한 잡지들, 유튜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타일리스트 혹은 패션 유튜버들은 심지어 트레이닝복을 입을 때조차 마르고 길쭉한 팔다리를 가져야 소위 ‘핏’이 산다고 말한다. 팔다리는 물론 목과 허리의 길이, 키, 가슴과 골반의 크기 등 신체 부위별로 기준을 정해두고 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단점’을 가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마치 모델 같은 신체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준다는 듯 이러한 콘텐츠를 만들지만, 이들의 신체는 단점을 가졌다고 평가하며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비너스와 어느 한 곳이라도 다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나 역시 나를 아껴주는 주변인들에게 '팔다리가 좀 더 길면 참 예쁠 텐데...', '나중에 휜다리를 고치러 가보자'등의 평가를 수시로 받아왔다. 누군가가 나의 생김새를 그저 비방한다면 무시할 수 있지만,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혹시 이들이 나를 볼 때 미디어에 나오는 모델이나 연예인을 보며 나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까 봐 걱정이 된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치마를 입었을 때는 나의 다리에 혐오감을 느꼈고 바꿀 수 없는 것을 '고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운동을 시작하며 종아리에 근육이 붙기 시작하자 운동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운동을 정말 좋아했지만 실제로 반 년 동안 운동을 그만두었다. 다행히 학교를 다니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더 이상 나의 신체에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공 공부를 하며 모델 사진을 보거나 비현실적인 12등신 스타일화를 그려야 할 때 여전히 나의 신체 특징들을 의식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패션 위크의 파파라치 컷들을 보며 시크하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를 하며 서울 패션 위크 시즌에 DDP 구경을 갔다. 그곳에서 처음 느낀 것이 언젠가부터 ‘힙’함은 개성 있음의 반대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힙하기 때문에 카메라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비슷한 스타일의, 비슷한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회가 이상적인 신체상으로 제시하는 형태의 신체를 가진 가진 모델들은 자신의 신체에 만족하며 신체에 관한 한은 존중받는 것일까?


최근 <픽쳐 미 : 모델 다이어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모델 사라 지프가 자신의 생활과 감정을 남긴 영상이었다. 사라 지프가 모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영상에서는 그가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모델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빠르게 흐른다. 이들은 20대가 되면 10대 모델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실제로도 은퇴를 ‘당한다’. 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패션 위크 동안 식사를 전혀 하지 않고, 4대 패션 위크가 열리는 런던, 파리, 밀라노, 뉴욕 사이를 매일 왔다 갔다 하며 잠도 자지 못하며 심지어는 마약에 의존하며 패션 위크를 견뎌내는 모델들도 있다. 패션쇼에 오를 수 있는 모델을 정하는 캐스팅에서도, 패션쇼 전에 모델에게 옷을 입혀보는 피팅 때도, 모델들은 물건 취급을 당한다. 캐스팅에서 디자이너들은 모델의 면전에서 그의 신체에 대한 불평을 하기도 하고, 옷을 모두 벗어보라고 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동료 모델의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나체가 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였다. 원래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 아니라, 패션 업계에서 물건 취급을 당하는 것에 무감각해졌기 때문이었다. 피팅을 할 때 디자이너들은 모델에게 옷을 입힌 채 조심성 없이 옷에 핀을 꼽는다.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모델은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마네킹인 것이다. 핀을 꼽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핀이 꽂힌 옷을 벗는 과정에서도 모델들은 피부에 상처를 입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모델은 항상 사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패션계 내에서 물질화되어 신체에 치명적인 방식을 통해 극단적으로 마른 상태를 유지하는 수많은 모델들과, 이들의 신체를 이상적이라고 칭찬하며 일반인들이 자신의 몸을 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드는 패션 산업은 매우 잔인하다. 모델이 겪는 고통과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패션 업계의 잔혹함을 알고 있었지만 모델의 데뷔부터 은퇴까지의 일상을 자세히 보게 되니, 내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다양한 문제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었고 2021년 지금까지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과제를 하며 190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지금의 모델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1960년대 168cm에 41kg이었던 영국 모델 트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몹시 마른 몸매가 모델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유행한다. 그러나 트위기는 19세의 나이에 '생계를 위해 옷걸이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기고 패션계에서 은퇴한다. 그러나 마른 몸 유행은 패션계에 계속 남아 현재 상태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과 맞물려 몇 년 전 구찌의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3일 동안 만들어낸, 앤드로지너스 룩을 선보인 구찌에서의 첫 컬렉션 대성공과 전 세계적으로 거세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의 시너지 효과로 앤드로지너스* 룩, 젠더리스 룩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는 컨셉이 외형적으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점점 남성 신체와 비슷한 굴곡 없이 극도로 마른 몸매를 가진 여성 모델, 기존의 '남성성'에서 벗어난 비쩍 마른 남성 모델을 더욱 추구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옷차림에서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가 몸에서의 경계마저 지우려는 시도로 번져가는 것이다. 따라서 패션계가 최근 선호하는 모델들을 보면 gender'less' 'look'가 아니라 진정한 앤드로지너스를 원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자웅동체 모델이 아니라 앤드로지너스 '룩'이다. 어떤 형태의 몸이든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형태로 만들면서 어떻게 독특함을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스타일은 몸이 아닌 옷에만 적용되어야 한다. 

GUCCI 2015 Fall  / GUCCI 2020 F/W

또한 많은 브랜드에서 여성 수트 등을 내놓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해당 브랜드가(물론 모든 브랜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페미니즘에 동참하기 위함이 아니라 페미니즘 '유행'에 맞추어 내놓은 상품이라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최근 읽은 마리 끌레르 패션쇼 잡지에서는 여전히 분홍색이 메인 컬러로 사용된 착장에서는 '지극히 소녀적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버버리 컬렉션에서는 겹겹이 레이어드 한 오간자 튈 드레스가 여성성을, 투박한 소재로 만든 트렌치코트와 어부의 옷을 본뜬 트렌치코트가 남성성을 드러낸다는 등 성고정 관념이 뚜렷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패션 잡지에서 여전히 이러한 단어를 문제의식 없이 쓰는 것을 본다면, 패션계의 젠더리스는 그저 하나의 유행하는 스타일일 뿐 우리가 기대하는 그 이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연히 Iris Van Herpen과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이 협업한 영상을 보았다.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Iris van Herpen의 오간자로 만든 의상을 입고 Biomimicry를 주제로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컬렉션을 영상으로 발표하는 상황에서도 기존의 패션쇼와 비슷하게 물화된 모델들이 나와 의상만을 눈에 띄게 하는 경우가 대분이다. 그러나 이 영상에서는 옷을 입은 사람이 존재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의상과 함께 의상을 완성하고 있었다. 발레리나의 움직임에 따라 돌을 던진 수면 위의 모습처럼 오간자가 펄럭이는데, 배경에서 보여준 바람 부는 사막에서의 모래 움직임과 유사하게 보이며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발레리나의 움직임과 옷이 만나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이렇듯 개인이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를 나타내는 몸을 가진 모델을 수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불편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방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Iris Van Herpen X Dutch National Ballet "Biomimicry"


올림픽 경기를 보면 각 종목의 선수들 마다 자신의 종목에 가장 최적화된 몸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은 현대의 비너스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인 경우일 때도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들의 외형을 사회적인 기준에 대어 보지 않는다. 선수들의 몸에서 자신의 종목에 최적화된 몸을 갖게 되기까지 했을 노력들 즉,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몸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개성이 전달된다. 


동생과 나는 신발 사이즈가 같다. 몇 년 전에 같은 디자인의 운동화를 산 적이 있다. 처음에는 서로의 신발을 구분하지 못하여 잘못 신고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내 운동화는 발 굳은살 때문에 신발 안쪽이 많이 헤졌다. 보기에는 좋지 않지만 그 상태가 편안하고 덕분에 동생 운동화와 구분도 간다. 극사실주의 초상화 화가인  정중원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 있는 그대로를 그리면 얼굴의 주인이 싫어한다고 하였다. 초상화에는 얼굴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대상은 두드러지는 특징을 콤플렉스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중원 화가는 대상이 생각하는 콤플렉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상을 구분하게 해주는 개성이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이 나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글 역시 누군가의 콤플렉스를 개성으로 바꾸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앤드로지너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앤드로스(andros)’는 남자를, ‘지나케아(gynacea)’는 여자를 뜻하며 남자와 여자의 특징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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