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9]
장서영 작가의 <세계의 껍질 우주의 뼈>는 시간과 공간의 끝을 이야기한다. 유한한 몸에서 무한한 확장을 꿈꾸는 암세포, 인간의 진출 범위를 증명함과 동시에 닫아버린 마젤란, 그리고 성장을 위해 탈피하는 갑각류. 이들은 서사와 이미지 모두에서 연쇄 작용처럼 연결된다. 공간의 끝은 껍질로, 시간의 종말은 뼈의 이미지를 빌려 나타나고, 지구 최후 생존자인 화자는 본체가 빠져나간 빈 껍질 안에서 끝을 무덤덤하게 곱씹는다.
'마젤란의 정신이 우주선으로 다시 태어나 마침내 지구를 떠났듯, 헨리에타의 세포들이 몸을 떠나 영생을 얻었듯 본체는 이미 이 껍질을 빠져나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만 여기 혼자 남겨두고 말이죠.'
-장서영 <세계의 껍질 우주의 뼈> 중에서 –
작가의 작품에서 성장과 도약은 필연적으로 끝을 불러오고 순환하며 연쇄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성장과 끝의 모순은 그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속 시공간의 끝을 사고하게 한다. 그렇다면 무한한 끝의 순환과 확장 속에서 인간의 몸은 어떤 변모를 꿈꾸는가.
<세계의 껍질 우주의 뼈>와 대구를 이루는 작품인 <탈피>에서 작가만의 몸에 관한 시도가 발견된다. <탈피>는 투명한 방에 전시된 <세계의 껍질 우주의 뼈> 맞은편에 동일한 구조로 전시되어 있었다. 관객은 이 두 작품을 넘나들기 위해 몸을 움직여 하나의 시공간적 ‘껍질’을 벗어나고, 들어가야 한다. 일종의 탈피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만나게 되는 <탈피>는 현재의 몸이 다음의 몸으로 넘어가는 연속적인 과정을 데이터모싱(Datamoshing) 기법을 통해 은유적으로 분절한 영상 작품이다.[1] 몸은 길게 늘어지고 픽셀처럼 깨져 본래의 형체로부터 빠져나온다. 과감히 인간의 전형적인 몸을 벗어던지는 작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음 단계의 몸을 상상하게 한다. 인간은 이 몸의 외형을 탈피해도 인간일 수 있을까?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해체와 분절을 목격한 관객은 몸과 관련된 고정 관념을 반문하며 인간이 지닌 덩어리의 존재 방식을 고민한다.
<탈피>가 외형의 분절을 통해 몸의 끝과 확장을 논했다면,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SF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 단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인간의 기존 외형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것을 대체하며 다음 단계로 향하는 인간을 그린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이보그 그라인딩'은 인간의 몸을 우주 환경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기 위한 개조 과정이다. 주인공은 인간이 발견한 우주의 한정적 범위를 넘어설 수 있는 통로인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사이보그 그라인딩 개조 과정을 거친다. 극한 상황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주인공은 이내 '인간 아닌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체세포를 다른 물질로 대체하고,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인간과 비슷한 외형, 그 껍질뿐이다.
'인간을 터널 너머로 보내기 위해 인간 자체를 개조하겠다는 발상은 이 프로젝트가 강력한 비난에 직면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주 저편을 보기 위해서 인간이 본래의 신체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인간의 성취일까?'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중에서-
장서영 작가의 탈피와 김초엽 작가의 사이보그 그라인딩은 몸의 탈피와 ‘다음’을 상상한다. 사이보그 그라인딩은 외형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고, <탈피>는 외형이 무너지는데, 어떤 것이 인간의 본질이 남게 되는, 다음 단계로 향하게 될 몸의 탈피일까. 끝의 순환 속에서 몸은 어떠한 끝을 넘어설 때, 이곳에서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외양으로, 새로운 관계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가?
[1] <SF 2021 : 판타지 오디세이> 전시 팜플렛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