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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Jul 07. 2021

가면

[그루잠09]

우리는 매일 밖에 나가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한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전에는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쓰면 수상한 눈초리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연예인 혹은 범죄자가 신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하는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마스크는 가면의 일종이었고, 물리적인 가면이 아닌, 추상적인 의미의 가면 역시 모든 문화권에서 진실하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꾸준히 가면을 찾아왔고, 하루 중 더 긴 시간을 더욱 다양한 가면을 바꾸어 쓰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지 맨 얼굴 상태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활동하던 화가 제임스 앙소르는 사람들과 심지어 자신이 쓰고 있는 심리적 가면을 물리적 가면으로 표현하며 사회를 풍자하던 작가이다.  


Self-Portrait with Masks, 1899, James Ensor


휴양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벨기에의 오스텐데에서 제임스 앙소르의 어머니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가면 등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죽은 쥐의 무도회’가 열려 모두가 가면을 쓰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화려해 보이는 휴양지 오스텐데는 17세기 80년 전쟁이 벌어진 곳으로, 앙소르가 어렸을 적에도 땅을 파면 해골이 끊임없이 나왔다고 한다. 생활력이 없던 앙소르의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후 앙소르는 집안의 유일한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기적인 응석받이로 자랐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평생 제대로 된 친구도 없이 지낸 앙소르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어있으며 주로 가면과 해골의 형태를 빌려 나타난다.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앞을 향하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반쯤 돌아선 채 고개를 돌려 관람자를 바라보는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가면들이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것은 가면 하나하나가 짓고 있는 표정들 때문에 가면이 얼굴에 붙어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히려 앙소르가 본인을 표현한 얼굴보다 생생한 표정을 하고 있다. 또한 화면을 얼굴들로 채워진 꽉 찬 구도는 기괴한 가면을 쓴 듯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느낌을 주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한 얼룩덜룩한 색들이 불안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가면은 그 용도에 따라 신성 가면, 배우의 가면, 가장무도회 가면, 사회적 가면(페르소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구분과 앙소르가 가면이라는 제재를 채택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에 나오는 가면은 가장무도회 가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축제의 가면은 참가자의 얼굴을 가림으로써 이들을 무질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신분과 출신이 사라지는 익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솔직해질 수 있다. 가면을 씀으로써 거울 등을 통한 이미지 이외로는 스스로 절대 볼 수 없는 진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기괴한 모습은 가면이 아닌 그들의 본성을 드러낸 모습일 수도 있다. 앙소르의 대중, 특히 부르주아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이는 그럴듯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통해 가운데의 보통의 인간의 모습을 한 남성이 앙소르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앙소르가 거짓되며 온갖 불쾌함을 풍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공포감과 함께 진실된 모습을 보이는 본인은 그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을 표출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 자체는 앙소르 본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는 피터 파울 루벤스의 모습이다. 앙소르 역시 거장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이다. 당시 앙소르는 전람회에서 꾸준히 낙선하며 주류 화단에서 거부되고 심지어 반 아카데미를 표방하던 젊은 전위 예술가 모임 20인회에서도 여러 번 작품을 거절당하며 퇴출당할 뻔한다. 어려운 살림이었음에도 추후 앙소르의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그를 아카데미에 보내어 미술 교육을 시킨 어머니와 가족들 역시 그가 돈이 안 되는 그림만 그리자 앙소르를 외면한다. 어디에서도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인간으로서도 사랑받지 못한 앙소르는 그림 속 루벤스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왜 이해하지 않는 건가, 인정하지 않는 건가, 경의를 표하지 않는 건가.”라며 좌절하던 그의 모습에서는 대중을 비판하고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앙소르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앙소르가 선택한 가면이 루벤스인 이유는 그의 명성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옆에 가득히 그린 그로테스크한 가면들과 루벤스 얼굴 형태의 가면을 동일시하며 사람들이 모두 경의를 표하는 주류 미술에 대한 반감을 표한 것이 아닐까.


Self-Portrait with Masks, 1937, James Ensor


그러나 앙소르가 40세 즈음 단독 전시회를 연 이후 같은 해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서 그의 초기 작품을 구입하고 2년 후 프랑스 전위 잡지 <라 플륌>지가 앙소르 특집호를 발간하며 그는 평생 원해왔던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1929년에는 알베르 1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받는다. 그의 나이 70세 무렵의 일이다. 1949년 앙소르는 그가 평생 다뤄온 주제인 죽음을 스스로 경험한다. 앙소르는 사회적인 명성을 얻은 후, 여전히 동물 실험 등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그림을 발표하지만 가면 그림을 통해 표현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은 약해진다. 1937년에 그린, 1899년의 그림과 동일한 작품명을 가진 자화상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야수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색채 사용에서 서정적 색채를 사용하며 전체적으로 강렬한 표현적 경향을 약화시키고 초기 작품을 밝게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이 그림에서 앙소르는 더 이상 가면을 쓴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림에 나오는 타인의 가면 역시 사물 그 자체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의 두려움이 결국 그가 사람들에게서 보는 가면과 앙소르 스스로의 가면을 벗긴 듯하다. 





참고

제임스 앙소르.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무서운 그림3 위험한 진실의 명화들. 나카노 쿄코

이선형. 가면, 그 진실한 얼굴. 프랑스문화예술연구, 2012, 39: 44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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