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앙데팡당전(展)

[수풀 07]

by E 앙데팡당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고 싶다. 필자는 그림을 보는 눈이 없다. 미술사 동아리 소속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아직도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 모르겠다. 어떠한 사전 지식 없이 훌륭한 그림을 알아차리는, 백 점의 수작 속에서 독보적인 한 점을 찾는 눈. 공부를 해서 얻는 지식과는 다른 그 본능적인 감각이 필자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유수의 미술관에 방문했을 때였다. 세기의 명화 앞에서도 든 생각은 ‘교과서에서 본 그림을 크게 확대해 둔 것 같다’ 정도였다. 원작의 엄청난 아우라로 인생이 뒤집히는 순간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무색하게 마음이 덤덤했다. <모나리자>보다 그를 둘러싸던 사람이 더 인상 깊었고,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 그의 그림은 이상한 방식으로 퇴보했다고 투덜대던 친구의 말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그런가, 미술관을 가게 될 때마다 어떤 의무감에 절박해진다. 미술관의 작품에 감동과 충격을 받을 수 없다면, 유명한 작품들을 보고 본전이나 뽑고 싶은 열망! 세계적인 명화들을 직접 봤다고 말하기 위해, 말하자면 약간의 허영심을 원동력으로 미술관을 열심히 돌아다니곤 했다. 물론 좋은 작품을 모른다고 해서 좋았던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 어느 미술관에도 유독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었다. 그러나 취향이 사람을 대변하는 시대에 선뜻 스스로의 취향을 소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취향이 아주 고급스럽거나 것은 독특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 조금은 민망한 필자의 취향을 소개, 혹은 변호하기 위해 앙데팡당전((展)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다운로드 (1).jpg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2-1863.


앙데팡당전(展) (Salon des Indépendants)은 1884년 엄격한 심사와 아카데미즘에 기반으로 한 프랑스 미술가전(展) (Salon des Artistes Français)에 대항해 열린 미술 전람회이다. 앙데팡당 (Indépendants)이 프랑스어로 ‘독립적’, ‘자주적’을 뜻한다는 점에서 앙데팡당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어떤 경향을 띄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앙데팡당전에서는 심사도, 시상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작품을 전시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권위적인 화풍에서 탈피한 앙데팡당전은 당연하게도 기존의 프랑스 미술의 노선과는 다른 새로운 미술사의 흐름을 내놓았다. 이러한 새로운 화풍은 젊은 화가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빈센트 반 고흐, 모딜리아니,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피에르 보나르 등의 작가들도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바 있다.

앙데팡당전의 전신에는 낙선전 (Salon des Refuss)이 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낙선전은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모은 전시이다. 1863년, 살롱전의 심사가 편향적이라는 화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나폴레옹 3세는 낙선 화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한다. 바로 그 낙선전에서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내보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는 이유로 마네의 그림은 엄청난 비난을 맞고 낙선전도 1회로 막을 내리고 만다.

이 앙데팡당 전이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그러하다면,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했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심사도, 시상식도 이루어지지 않는 앙데팡당 전에서 관람객들은 무슨 기준으로 작품들을 판단하였을까? 앙데팡당전의 전신에 낙선전이 있다는 점에서 기존에 있던 미술학계의 권위에 기댄 기준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낙선"한 작품들이 시초가 된 앙데팡당 전에 발걸음을 옮기게끔 한 것은 기존의 권위를 떠나 앙데팡당전들에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과 혹은 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한 호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이 앙데팡당전의 작품을 평가한 기준은 새로움과 혁신과 더불어 작품에 대한 애정 또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le chat blanc.jpg 피에르 보나르, 하얀 고양이 (Le Chat blanc), 1894.


이제 필자의 은밀한 취향으로 남겨두려고 했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피에르 보나르의 하얀 고양이 (Le Chat Blanc) 란 작품이다. 이 썩 귀엽지 않은 고양이가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바로 그 디테일한 못생김에 있었다. 오랜 타지 생활로 조금 지쳐 있던 찰나, 이 현실적으로 못생긴 고양이 그림은 어쩐지 한국에 있는 필자의 고양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얌전히 앉아있지도 안겨 있지도 않은 이 흐물흐물한 그림은 대단한 미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아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직 봐야 할 그림들이 줄지어 남아있는데도 집에 있는 고양이를 두고 떠날 때 마냥, 그림 앞에서 발걸음 떼기 어려웠다. 결국 나도 모르게 외로웠던 마음을 채워준 작품은 어떤 세기의 명작도 아닌 이 쭈굴쭈굴한 고양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비록 이 그림을 통해 내 인생을 뒤흔들 만큼의 충격은 받지 못했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위로는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거기에는 미적인 감각은 필요하지 않았다. 미술이 주는 울림은 내 예상과 다르게도 누구에게나 평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수많은 명작을 놔두고 이 그림이 제일 좋았다고 말한다면 스스로가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에 쐐기를 박는 것 같았다. 혹은 이 작품이 좋은 이유에 대해 사연이나 납득될 만한 근거를 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불쑥 들 때쯤, 다시금 앙데팡당전을 떠올려본다. 결국 이 앙데팡당 전이 단순히 낙오된 작가들의 전시회로 끝나지 않고 20세기의 새로운 화풍을 이끌어낸 데에는 그 작품을 보러 간 관객들에 있다. 이는 기존의 기준에서 벗어나 작품을 즐기는 일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앙데팡당 전의 존재는 단순히 창작자만을 기존의 권위에서 해방시킨 것은 아닌 듯하다. 작품을 향유하는 데에는 물론 지식도 필요하지만,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에. 피에르 보나르의 <하얀 고양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앙데팡당전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 필자처럼 말이다.



88a884aa0923db80c24cc13114a21295.jpg 피에르 보나르, The Demanding Cat, 1912



흔히들 예술에 순위를 매길 수 없다고 하지만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렇다면 현실과는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에 순위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어딘가 부족한 작품들을 세기의 명작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객관적인 평가나 미적인 완벽함의 논리로 따져볼 수 없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존재하는 결핍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흘러 들어가 그 부족함을 매워 주는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의도치 않아도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듯이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채워주는 단 하나의 앙데팡당전은 어떠한가? 당신의 전시에 기꺼이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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