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앙데팡당X아트렉처/수풀]
뚝딱이란 무엇인가? 시쳇말로 몸의 움직임이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를 뜻한다. 최근 들어서는 단순히 몸의 움직임에 한정 짓지 않고 성격이나 태도 등에 이르러 널리 쓰이기도 하지만, 뚝딱이라는 말의 출발은 몸의 태에서부터 나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뚝딱이들은 흔히 몸의 움직임이 중요시되는 무용이나 운동의 영역에서 주로 나타날 것 같지만 놀랍게도 미술 작품 속에서도 뚝딱이들이 등장한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사람의 몸을 부자연스럽게 표현한 미술 작품들이 존재한다. 주목해 봐야 할 지점은 그들이 몸을 어색하게 표현하는 이유에 있어 단순히 화가의 그림 실력이나 자질의 부족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 화가들에게 사람의 몸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외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미술의 뚝딱이 연대기를 따라감으로써 각각의 미술사조 속에서 표현되는 "뚝딱거리는" 몸이 반영하는 당대의 사회 인식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중세미술
흔히들 중세시대를 미술의 암흑기라 부르곤 한다. 아무래도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섬세한 미술작품들에 비해 어딘가 엉성한 모양새를 가진 중세의 회화 작품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미술은 단순히 회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은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 등의 작품까지 폭넓게 이루는 말이다. 이점에서 중세가 미술의 암흑기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마지않는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사르트르 대성당과 같은 건축물들은 모두 중세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스페인의 사그리아 파밀리아 또한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그 외에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 아름다운 건축들은 모두 중세시대의 건축 양식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다. 아름다움과 과학적인 원리로 빚어진 듯한 중세 건축물을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중세 회화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중세 시대의 건축을 통해 우리는 중세 사람들이 미적 감각이나 과학적인 관찰력의 측면에서 여타의 시대 사람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는 점을 파악했다. 따라서 이들이 회화 작품, 특히 인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전후 시대와 비교하여 어색한 부분이 있는 것은 그들의 자질이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인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딘가 엉성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 현실 세계의 인간, 더 나아가 인간의 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세는 신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중세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시되는 것은 신의 영적인 세계와 그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살아있는 인간의 몸, 즉 현세의 몸은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다. 몸이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니 필연적으로 그 표현의 정확성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조의 작품들보다 부족해 보이는 듯한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신이 있는 곳에 닿고 싶은 열망이 담긴 대성당들의 높은 첨탑과 신의 은총을 상징하는 빛을 더 받기 위해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창조해낸 것과는 대조된다.
따라서 중세 회화 속 어색한 몸의 표현은 당시 중세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여실히 반영한다. 눈에 보이는 몸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영적인 세계를 향한 갈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매너리즘
중세미술 이후 그 이름조차 찬란한 르네상스가 등장한다. 그 이후 회화에서 역동성과 명암의 대비를 강조한 바로크 시대가 태동하는데, 그 사이에 낀 오묘한 미술사조가 있다. 바로 매너리즘 사조이다.
매너리즘은 아마 사조보다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2)을 의미하는 "매너리즘에 빠지다"라는 표현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매너리즘"은 이 매너리즘 시기에서 유래했다. 물론 미술에서의 매너리즘은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표현과는 다른 뜻을 가진다. 미술 사조에서 쓰이는 매너리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매너리즘 직전의 시기가 르네상스임을 주목해보자. 이 시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었다. 회화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대가들의 바로 다음 세대 작가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회화를 통해 도달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부딪혔다. 이러한 후대 화가들이 대가, 특히 미켈란젤로 작품의 유행에 따라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후대의 평론가들이 붙인 이름이 매너리즘이다. 3)
매너리즘 시기의 그림을 보면 정말로 어떤 분야나 그렇듯 전 세대의 거장을 뛰어넘지 못하고 일견 후퇴한 듯한 모양새이다. 매너리즘 작품에는 대표적으로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가 있다. 그림 속 성모의 비율이 맞지 않는 인체나 기괴할 정도로 길어진 목을 보면 언뜻 B급 영화 속 한 장면 같아 보이기도 한다. 성모의 몸뿐만 아니라 화면 전체의 구도 또한 그러하다. 그림 뒤편에는 부자연스러운 서 있는 기둥이 있는데, 이 역시 화면 중심에 있는 성모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율로 늘어져 있다. 4)
그러나 매너리즘 화가들의 몸과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이 조금 독특하다고 해서 단순히 이들이 거장의 수법만을 따라 했거나 후퇴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매너리즘에서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작품의 일관된 불균형이다. 이들이 작품의 자연스러움과 조화를 깨고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정통적인 수법을 피해 회화를 그리는 새로운 방식을 이룩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가령 파르미나자노는 화면 속에서 반복해서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상들을 그려낸다. 성모의 목과, 신생아인 예수의 몸, 화면 뒤의 기둥, 그리고 화면 오른쪽 아래 비율에 맞지 않는 인간상은 그가 가진 어떤 길쭉한 것에 선호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일관적인 표현은 그가 의도적으로 기존의 르네상스 시기에 중요시되었던 균형과 비례를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음5)을 보여준다. 즉, 그 전 시대 거장들이 정점에 달해 놓은 회화라는 영역에서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6)해 내고자 했다.
따라서 매너리즘 속 부자연스러운 몸의 표현에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듯한 회화라는 영역의 새로운 측면을 모색하는 당대 화가들의 진지한 성찰과 이를 깨뜨리고자 하는 도전 정신이 담긴 것이다.
낭만주의
낭만주의 조각가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지옥의 문>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생각하는 사람> 이 앉아있다. 언뜻 보기에 뚝딱이의 계열에 끼기엔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이는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주목해 보자. 보이는 것과 달리 그의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기란 쉽지 않다.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무릎에 올려놓은 채 턱을 괴는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하는 건 마치 팔꿈치를 혀로 핥으려고 노력했던 어린 날을 떠올리게 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로댕은 왜 이런 불가능한 자세의 동상을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먼저 당시 미술사의 흐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낭만주의가 태동하던 당시에는 또 다른 미술사조가 있었다. 바로 직전의 귀족 중심의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로코코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이성과 균형을 중시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했던 신고전주의이다. 따라서 신고전주의 작품에는 관람객을 도덕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영웅적인 인간들이 주로 나타나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인간에 있어서 중시했던 측면은 인간의 지성,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이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가 다비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영웅적인 인물들이나 당시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을 작품에 등장시켰다. 또한 작품의 표현적인 측면 또한 이들이 인간을 해석하는 방식과 닮아있다. 신고전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형태가 명확하고 확실한 선을 띄고 있다. 더불어 화면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반듯한 균형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다시 낭만주의 작가인 로댕의 <지옥의 문>으로 돌아와 보자. 먼저 <지옥의 문>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청동은 그 재료의 특성상 여타의 재료보다 거친 표면을 가진다. 이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진 재료는 그 특성 자체와 그로 인해 자연적으로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관람객의 시선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비율에 맞지 않고 불분명한 형태로 늘어진 인간들의 몸은 <지옥의 문>의 여기저기에 덩어리 져 있다. 이렇게 일그러진 인간의 신체는 지옥에 던져진 인간 내면의 고뇌와 고통과 잘 나타내는 듯하다.
이러한 측면들은 모두 앞서 이야기했던 신고전주의 특징과는 반대된다. 즉, 로댕이 속한 낭만주의의 작가들은 거칠고 흐트러진 형태와 균형을 잃은 인체의 표현을 통해 이성과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더불어 앞서 청동이라는 재료와 일그러진 형태의 몸은 작품 그 자체가 정확한 서사를 전달하기보다는, 불분명한 형태를 해석하는 관람자의 상상력을 중요시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들은 동시대 신고전주의의 지향점과 반대되는 인간의 주관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 인간의 몸을 통해 표현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불편한 자세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담겨있다. 청동이라는 재료와 형태가 불분명한 몸을 통해 인간 개인이 가지는 주관적인 상상력과 인간 내면의 감정들을 중시하고자 했던 당시의 화가들의 지향점이 드러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의 몸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함께 했다. 이 때문에 뼈와 피와 살에 불과한 우리의 몸은 어느 분야에서든 언제나 살덩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왔던 것 같다. 미술 속의 "뚝딱거리는" 몸조차도 당대 사회의 관심사를 드러내기도 하고, 당시 화가들의 고민이 담기기도 했으며, 인간을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틀이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순간순간 우리가 어떻게 동시대를 바라보는지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가 몸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 돌아보자. 그 시선 속에 우리의 사회가 담겨있을지 모른다.
1) 사진 출처:
2) 매너리즘,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2021.07.25, https://ko.dict.naver.com/#/entry/koko/7649e734f3e94c50b9542c00b99bac54
3) E.H 곰브리치 (2013), 『서양 미술사 (문고판)』, 예경, 273p.
4),5),6) E.H 곰브리치 (2013), 『서양 미술사 (문고판)』, 예경, 2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