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무05]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展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 천경자 컬렉션 전시실
상설전시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지만 그동안 주류적인 흐름은 남성들의 역사로 흘러왔다. 요즘에서야 여성 위인들이나 여성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시도들이 있다. 그럼에도 아직은 서구의 인물들이 주로 소개되고는 한다. 우리나라의 여성 화가는 일찍이 누가 있었을까? 또한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작품 활동을 했을까? 여기 한 고독한 여인이 있다.
천경자 화백(1924~2015)은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일찍이 화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천경자 화백은 묵으로 표현하는 전통적인 동양화 화풍이 아닌 채색화를 주로 선보였는데, 그로 인해 수묵화 중심의 동양 화단으로부터 오랜 기간 배척을 받으며 외롭고도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환상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첫인상은 우선, 환상적이며 화려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문학과 설화적 모티브를 환상적인 채색화로 그려낸 그의 작품들은 어딘가 고독하고 허무한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천경자 화백의 작품들은 자전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는 자기 고백적인 글을 엮어 책으로도 출판한 바가 여럿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슬픈 전설의 이야기’라고 고백한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천경자 화백은 '꽃과 여인의 화가'로도 불린다. 작가의 그림에서 주로 등장하는 여인과 장미, 그리고 뱀 등의 소재는 작가의 세계가 투영된 상징물들이다. 특히 작가는 ‘뱀’에 매료되어 뱀집을 찾아다닐 정도로 뱀을 그리는 것에 열중했다고 한다. 자신의 저서에서도 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요즘 나의 작품 주제에는 ‘꽃’이 많고 ‘여인’이 많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을 받을 시절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오면 나는 그야말로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홀려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기쁨, 고뇌를 맛보게 했다는 창조의 요술사, 요기로운 광채와 지성의 뱀님을 한 번 더 그려볼까 한다.”
- 천경자(1981),『캔맥주 한 잔의 유희』, 문화서적-
또한, 작가는 젊은 시절의 아픔으로 남은 결혼생활, 지독했던 가난과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을 수십 마리의 징그러운 뱀 무더기로 담아냈다. <생태>라는 제목의 작품에 그려진 뱀은 총 35마리로, 작가가 사랑하던 뱀띠 남자의 나이이기도 하다. 작가의 힘들었던 젊은 시절의 기억들이 뱀으로 표현되어 서로 얽히고 뒤엉켜 있는 듯한 이 그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작가가 가장 아끼던 그림이었다고 한다.
작가는 젊은 여인의 초상화도 여럿 남겼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외모는 이국적인 모습이던 작가의 외모와도 닮았다. 작가의 초상화에 자주 등장하는 독특한 여인상은 아마도 작가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의 그림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여성작가의 눈으로 본 여성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에는 담배를 피는 여인의 모습도 종종 등장한다. 이는 서구 남성 작가들이 자신들의 초상화에 같이 등장시키던 담배 파이프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전의 남성 화가들의 그림에서 담배 파이프는 주로 화가로서의 당당함이나 ‘남성성’의 상징인 남근적인 이미지로 등장했다. 그러나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 여인들은 그저 담배를 피울 뿐이다. 그 속에는 우월함이나 권위적인 모습도,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다. 여인의 머리 주변에는 화려한 색채의 나뭇잎과 꽃이 장식처럼 꾸며져 있지만 인물의 표정과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나뭇잎이 그림에서 쓸쓸함을 더한다.
작가는 꽃중에서는 특히 장미꽃을 좋아했다. 장미는 작가가 자신의 재산목록에 포함시키고 싶은 정도로 사랑했던 꽃이라고 한다. 장미 또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장미의 향은 매혹적이지만, 가까이하면 가시에 찔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가시 돋친 장미를 통해서 마냥 아름답지는 않은, 사랑의 아픔과 그로 인한 한을 보여준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들로 가득한 화면은 어딘가 쓸쓸함을 뿜어내는 듯 하다.
천경자 화백은 개인사에 있어서도, 작가 생활에 있어서도 아름답지만 고독했다. 그러나 그는 작품 속에서 자유로웠다. 그는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의 작품은 과거의 추억과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다.
* 천경자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여 '천경자실'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展 전시 리플릿
- 천경자(1981),『캔맥주 한 잔의 유희』, 문화서적
- 『천경자 화백 | 불꽃 같은 영혼의 화가 천경자 화백 공식 웹사이트』, https://chunkyungj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