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무04]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초록이 짙으며,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다.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색은 빛이 분산된 것이고, 시각적인 인식 작용이다. 그러나 색은 제각각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색은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영향을 미치는데, 예를 들면 빨강은 열정, 힘과 에너지, 피, 흥분, 분노 등을 연상시키며 파랑은 진정, 신성함, 바다, 차가움 등을 연상시킨다. 이렇다시피 색은 각각의 색마다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며 그로 인해 예술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경영 등에서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인류에게 색은 정치적이고 비언어적인 소통 수단이다. 수많은 국가와 정당, 기업마다 고유의 색이 있고 색을 통해 집단이나 계층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는 각각 빨강과 파랑의 색깔론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을 가진 색의 성격을 보여준다. 정치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에서도 직업군에 따라 노동자들을 분류할 때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에 비유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주로 입는 유니폼의 색에서 나온 명칭이다. 지극히 직관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매년 광장을 수놓는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의 깃발은 평화의 상징과 더불어 성소수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여자아이는 분홍색의 옷을,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의 옷을 입히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당장 마트로 달려가 유아와 아동 관련 물품을 파는 코너에 가봐도 여아 코너는 분홍색이고 남아 코너는 파란색이다. 또 여자화장실은 빨간색이나 분홍색이고 남자화장실은 파란색이지 않은가? 그리고 여성과 관련된 단어에는 분홍색인 ‘Pink’라는 단어가 같이한다. 핑크 칼라, 핑크 택스 등의 용어가 그러한 예다. 이제 우리는 분홍색을 보기만 해도 '여성스러움'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분홍색을 의미하는 ‘Pink’는 17세기인 1678년부터, 파란색을 의미하는 ‘Blue’는 13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단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여자=분홍'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을까?
원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남녀 상관없이 백색의 흰옷을 주로 입혔다고 한다. 흰옷은 순수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흰옷은 표백제를 사용해서 세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옷의 염색이 빠지거나 얼룩이 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 옷의 색은 흰색이 선호되었다. 한편, 염색 기술이 발전하며 색깔이 있는 아이 옷의 인기가 늘어났는데, 놀랍게도 남자아이들은 분홍색, 여자아이들은 파란색의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당시 분홍색과 파란색은 각각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좌) 작가 미상, <Young Boy with Whip>, 1840년대, 캔버스에 유채, 호놀룰루 미술관 |
(우) 토머스 게인즈버러,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년>, 1782, 캔버스에 유채
(좌) johannes cornelisz verspronck, <Girl in a Blue Dress>, 1641, 캔버스에 유채, 66.5X82, 레이크스 미술관 |
(우) 윌리엄 베렐스트, <Portrait of a Girl in a Blue Dress with a Parrot in a Palatial Garden>, 1730년대, 캔버스에 유채, 103X156
과거에는 분홍색은 말하자면 빨간색의 하위 버전이었다. 힘과 에너지를 상징하는 빨강은 당시 남성들의 색이었고, 따라서 분홍색은 ‘결단력이 있고 힘찬’ 남자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색이었다. 반면, 파란색은 ‘우아한’ 색이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색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성별에 따른 색에 대한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또, 분홍색이라는 색은 여성에게 어떤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는가?
역전된 색의 의미와 사용은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 등장하여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 당시 사람들은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게’ 옷을 입었다. 새로운 마케팅에 따라 시장은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을,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을 판매하였다. 매체들은 이러한 새 유행을 선도했다. 1960년대 일부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성별의 따른 색의 구분 없이 중성적으로 입자는 운동도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성고정관념 마케팅 아래에서 잊혀졌다. 도대체 무엇이 ‘여자다운’ 색이고, 무엇이 ‘남자다운’ 색이란 말인가?
그런데 대량생산 체제 안에서 왜 성별에 따른 색의 고정관념이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을까? 그냥 기존의 사고대로 남자아이의 물건은 분홍색으로, 여자아이의 물건은 파란색으로 생산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색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데에는 나치가 분홍색이 ‘여성스럽고’ 유약한 색이기 때문에 분홍색을 소비하는 남성을 동성애자로 낙인찍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다 문득 여성들에게 분홍색을 강요한 이유는 화장품 산업의 발전과도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조 화장품은 대개 붉은 뺨과 붉은 입술을 강조하는 데 사용한다. 붉은 색조는 피부 위로 드러나는 혈색을 강조하는 역할로 사용되는 데, 이는 지극히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성적 자극을 받아 흥분할 때 몸이 상기되어 붉어지는 것, 입술과 성기에 피가 몰려 붉게 보이는 것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는 틴트의 유래가 과거 스트립 댄서들은 유두를 붉게 물들인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이야기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전부 성적인 요소들을 부각하는 수단이다. 한때 유행한 메이크업 중에서는 술 취한 듯 붉게 달아오른 모습을 연상시키는 화장법이나, 귓불이나 팔꿈치까지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이색적인 화장법들도 있었다. 예상하건대, 여성들이 자신들의 입술과 뺨을 표현하기 위해 붉은 색조의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은 여성이 분홍색을 소비하도록 하기에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본주의의 마케팅으로 인해 정착된 성고정관념은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분홍색 옷을 입고 분홍색 물건을 사용하는 남자는 ‘여성’스럽고 ‘동성애자 같다’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게 색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분홍색에는 '여성스러움'이라는 의미만이 남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여자아이들은 분홍색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여기서 분홍색이 가진 '여성스러움'이란 가부장적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은 순종적이며, 젊음의 아름다움을 유지한 여성의 모습이다. 빨강보다 부드러운 색인 분홍색에는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모습과 성적으로 흥분한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여성에게 분홍색을 강요하는 사회는 성별이분법 사고를 바탕으로 하며,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여성성'은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분홍색의 의미가 다시금 바뀔 수 있을까?
<참고문헌>
- 김우룡 외(2014),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 개빈 애번스(2018), 『컬러 인문학』, 강미경 역, 김영사
- 베탄 패트릭 외(2014), 『1%를 위한 상식백과』, 이루리 역, 써네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