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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앙데팡당 Oct 28. 2019

위작에서 찾는 예술의 가치

E앙데팡당X아트렉쳐 / 보배

 ‘위작보다 원작을 선호하는 태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의견은 ‘정당화될 수 없다’였다. 그러나 몇몇 미학자들의 의견과 그 근거를 접한 후 위작은 원작과 동일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처음에 위작이 원작과 등가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근거는 원작만이 가진 독창성이었다. 형상, 색, 구도, 재료 등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창조자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술(본 글에서는 ‘시각미술’의 줄임말로 사용하기로 한다)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개념’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구현된 형태인 ‘이미지’도 있다. 예술의 존재 이유는 예술가의 개념, 즉 생각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그 이미지를 감상자와 공유하기 위함이다. 감상자가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와는 별개로 그 이미지가 ‘보여진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따라서 만약 위작이 원작보다 더 나은 테크닉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더 잘 구현한다면,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원작보다 위작이 더 나은 작품일 것이다. 정작 위작에는 원작에 담긴 개념이 의도되지 않았을지라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원작보다 위작에서 원작의 메시지를 더 찾기 쉬울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하여 위작에서 보다 많은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기게 된다.

Real Brillo Boxes, designed by J. Harvey 
Andy Warhol, <Brillo Box>, 1964

 독창성이 예술의 필수 요소인지에 대해서도 고찰해봐야 한다. 창조적 활동만이 예술인가? 앤디 워홀의 <Brillo Box>는 제임스 하비의 <Brillo Box>를 그대로 본 따 제작되었다. 만약 앤디 워홀이 제작자가 자신임을 밝히지 않고 제임스 하비의 작품인 것처럼 위조한다면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사람들은 위작인 <Brillo Box>를 앤디 워홀의 것이라고 알려진 <Brillo Box>만큼 예술 작품으로 여길 것인가? 앤디 워홀의 <Brillo Box>는 명백한 복사본인데 우리는 그것을 심지어 원본보다 더 미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앤디 워홀의 <Brillo Box>에는 독창성이 없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앤디 워홀의 <Brillo Box>나 뒤샹의 <샘>에 독창성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어떤 이미지를 창조하지 않았고 기존의 이미지나 오브제를 차용했지만, 예술가가 차용할 대상을 선택한 의도에 독창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위작에 적용해 보면 위작 행위에도 의도가 존재하므로 독창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베르메르가 그림을 그린 의도가 17세기 네덜란드의 가정생활 인물을 정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있었다면, 한 반 미허른이 베르메르 위작을 그린 의도는 20세기 미술 비평가들의 미적 규준이 잘못되었다고 폭로하는 것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위작의 경우, 원작만큼이나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창성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시각미술은 맥락도 중요하지만 우선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감상이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작품에 보다 내재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술을 보는 현대의 시각에는 시대적 배경과 맥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디케와 단토의 예술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예술이라고 정의하는 주체는 미술사가, 비평가 등의 소위 전문가들이다. 그러므로 독창성 규정도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보편적으로 알려진 미술사 내 양식적 혁명, 예술가의 독보적 업적이나 위대성 등은 소수의 전문가들에 의해 선택되었다. 흔히 미술사 내 거장들의 작품을 ‘원작’이라고 하고, ‘독창적 화풍’의 창시자들로 인정하지만 정말 그들이 ‘처음’이며 ‘유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속단이다. ‘우월’의 기준은 계보학적 미술사에서 살아남은 거장들과 그들을 그 역사의 반열에 올려 준 작품들에 기인한다. 그러나 역사가 우연히 놓치거나 찾지 못했더라도 미술사 내의 ‘거장’들에 버금가는 예술이 선행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원작’이라 불리는 그들의 작품들 이전에 진정한 원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원작의 우월성은 더욱 불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예술의 가치는 미술사가, 미학자, 비평가 등의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감상자가 만들어낸다. 앞서 말했듯 예술의 존재 이유가 첫째는 예술가의 표현, 둘째는 그 표현을 타인이 감상, 공유 또는 해석하는 것에 있다. ‘향유’가 예술의 가치이다. 키이란은 “우리가 감상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작품들 중에도 위대한 작품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위대함’은 감상자가 설정하지 않는다. ‘위대한 작품’의 기준은 철저히 예술계 내부에서만 논의된 것으로 오히려 감상자의 자유로운 감상을 방해할 수 있다. 예술계가 규정하는 예술의 기준은 어떤 작품의 해석이나 감상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여 감상자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든다. 키이란은 니콜라 푸생의 작품을 예로 들며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아무 경험을 제공하지 않음에도 좋은 작품이라고 인정받는다고 했다. 이 시각은 푸생의 작품에 철저히 학문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푸생의 <황금 강아지에 대한 숭배>의 모티프가 성경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감상자는 내재적 관점으로 푸생의 그림을 능동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렇듯 원작과 위작은 독창성, 미적 가치만으로는 우월과 열등을 구분할 수 없고, 또한 우월과 열등의 기준마저 의문스러우므로 위작보다 원작을 선호하는 태도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향유에 있다. 

니콜라 푸생, <황금 송아지 숭배>, 1633-1634



참고문헌     


<논문>

Alfred Lessing(1964), 「위조품: 무엇이 나쁜가?」, 오병남 역, 『The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23.     


<단행본>

매튜 키이란(2010), 『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역, 북코리아.

아서 단토(2004), 『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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