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 앙데팡당 Oct 14. 2019

종교 또는 신화로 무엇을 포장하려 하는가

E앙데팡당X아트렉처 / 모그


  인물화는 회화의 주요 장르로, 인물은 시대 및 지역을 막론하고 주요 소재로 그려진다. 예술이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투영된 창작물이라고 할 때 화폭 속에 인물을 담는 것은 창작자가 인물을 통해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물을 표현하는 것은 어떤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고 그만큼 관람자에게 직접적인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는 한명의 여성을 화폭 중앙에 담은 동서양의 그림을 거칠게 비교해보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화에서 중요한 지점은 종교와 결부된 여성을 어떻게 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서양미술작품에서 신화 속 여성을 회화에 등장시키는 것을 자주 볼 수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비너스가 있을 것이다. 비너스는 토르소 형태의 고대 조각을 비롯해 중세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 단골 소재이다. 여성 누드화의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너스는 대게 나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너스를 신화 속 인물이라고 인식하기 보다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살짝 포장한 여성 육체로 인식한다. 종교적 영험함이나 고도의 정신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종교적 거룩함이 담김 여성 인물화는 "성녀"의 이상향인 성모마리아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 중심주의에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온 이유는 올해 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근대서화전에 전시된 어떤 그림에서 출발한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차례 입상한 역사인물화가가 그린 어떤 그림을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전시가 끝난지 반년이 지나고 살며시 다시 들어 올려 보려고 한다. 이 그림은 최우석의 <승려복을 입은 여인(1920s)> 이다. 박물관 측에서 제공한 본 그림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불교를 통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신화적인 요소를 통해 신비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본 미술에서 유행하였던 것'으로 일본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설을 뒤로 한채 그림을 감상해보자.


최우석, <승려복을 입은 여인>, 1920년대, 비단에 색, 삼성미술관


  위 그림은 분명 승려복이라는 특징을 통해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성이라는 점은 이 대상이 비구니이거나 여성 동자승이라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면 중앙에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모습은 종교적인 숭고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뒤에 배경에 있는 무녀들은 불교가 아닌 무속신앙을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승려복을 입은 여인과 두 무녀를 한 화폭에 배치하면서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어떠한 도덕성 또는 정신적 가치를 담아내려고 하지 않고,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인물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승려복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 화폭에 여성 종교인의 모습을 담았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담고 있다. 이런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현재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소비되고 있지 않은가.


(좌)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유화, 119x165cm, 우피치 미술관
(우) 마네, <올랭피아>, 1863, 유화, 190x130.5cm, 오르세 미술관



   두 그림은 서양 미술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역사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여성 누드의 전형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그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작품 제목이다. 하나는 신화 속 여성의 이름을, 하나는 현실 여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선 왼쪽의 그림은 '비너스'의 누드화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 이는 나체의 여성에게 신화 속 여성이라고 명명하면서 현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 여성주의 관점에서의 대표적 견해이다. 반면 오른쪽의 그림은 동일한 여성 누드 그림이나, 마네는  '올랭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유명한 성노동자의 이름을 그림 속 여성에게 붙여주었다. 이는 너무 외설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아카데미에서  탈락시켰다. 이는 성매매를 했던 남성들의 죄책감과 위선적 면모를 폭로했다는 스스로의 죄책감으로 인해 현실 여성의 이름을 가진 누드화를 보지 못했던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두 그림의 차이는 작품 제목에 어떤 여성의 이름을 사용하는지 뿐이다. 신화 또는 종교를 매개로 하는 여성 인물화가 특별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도 있다. 이는 최우석이 승복을 입은 여성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들 비슷한 문제의식이 이를 관통한다.


이상 서양 미술의 대표적인 두점의 작품과 한반도에서 그려진 근대 서화 작품을 통해 (물론 이를 보여주는 그림은 끝없이 찾을 수 있다), 신화 속 여성 또는 종교와 관련된 여성을 그린 그림들을 통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한 모순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점의 근대 서화에서 시작된 이 뿌리깊은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신화'나 종교를 주제로 여성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표면적인 해석에 대해 우리의 눈으로 어떻게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모그]

매거진의 이전글 화가와 미술사가의 줄타기, 한국 단색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