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호구의 역사'를 고백합니다

by 다른뿌리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나를 찾아왔다. 나를 특별히 좋아하거나 굳게 믿는 사이도 아니면서 급하면 일단 내게로 왔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너 정말 그래서 그랬니, 하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조용히 확신할 만큼 내게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기록하려는 이야기는 나의 타로 리딩 상담일지이기도 하고, 내 오랜 '호구의 역사'를 기억하고 더듬는 아주 개인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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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동아리 활동에 완전히 미쳐서는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기숙사에서 짤리고 말았다. 동아리 활동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삼세번으로 정해져 있는 외박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기숙사 사감 선생님을 찾아가 내가 왜 밤을 새워야만 했는지, 기숙사 점호보다 중요한 일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나름 논리정연하게 구구절절 따져봤지만 사감 선생님이 우리 과 전임교수였음에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서둘러 자취방을 구해야 했다.


1년에 90만원만 내면 전기세, 수도세, 난방비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는 단칸방을 겨우 하나 구했다. 부모님께 용돈 한 번 받은 적 없는 가난한 집 사정에 90만원은 너무나 큰 돈이었다. 방세를 함께 낼 룸메이트를 구하는 게 우선이라는 조언을 듣고 바로 수소문하자 다행히 후보자가 나타났다.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였다. 통학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왕복 두세 시간이 아까워 자취를 하고 싶던 참이라고 했다.


하루에 몇 가지씩 기숙사에 맡겨둔 짐을 천천히 옮기며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두 명 분의 짐은 생각보다 단출해서 좁은 방 한 칸에 사이좋게 서로의 공간이 채워졌다. 선배와 나는 동아리 모꼬지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도란도란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었다. 다라락 줄 서 있는 여러 개의 방과 공동 화장실이 딸린 별채를 본채 옆에 마련해 두고 세를 놓던 집주인은 학생들한테 무슨 돈이 있겠느냐며 나중에 준비되면 그때 주라고 방세 치르는 날을 미뤄주었다.


짐 정리도 끝나고 이제 방세만 치르면 되는데, 집에 잠시 다녀온다던 선배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입주 취소 통보를 해왔다. 그 선배도 급한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직 그 선배의 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방에 틀어박혀 집주인에게 어떻게 사정을 이야기하면 좋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몇 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 사이 나보다 조금 늦게 기숙사에서 짤린 동기생 하나가 방을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나는 동아리 활동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데다 수업을 빠지기 일쑤인 아웃사이더라 서로 눈인사만 하며 데면데면하던 사이였지만, 앞뒤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약속을 잡고 룸메이트 제안을 했는데 흔쾌히 좋아, 하고 웃던 동기의 응답이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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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가 될 뻔했던 동아리 선배의 짐들이 다 빠지고 진짜 룸메이트의 짐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짐 정리를 같이 하면서 찬찬히 뜯어보니 그 친구는 나보다 더한 아웃사이더였다. 무려 중학교 때부터 타로 리딩으로 이름을 날렸고 하드보일드 19금 H물 연애 소설을 구독하거나 직접 연재하고 있었으며, 세계 이곳 저곳의 차(茶) 종류를 수집하는 등 찐 덕후 인생이었던 것이다. 조금 다른 결이지만 타고난 어둠의 자식이었던 나는 언제나 혼자였던 어둠 속에서 진짜 친구를 만나 손을 잡았다.


자신의 파란만장 덕후 인생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히 드러내던 그 친구가 타로 리더라는 소문이 돌자 자취방은 금세 북적거렸다. 특유의 빙긋 미소를 지으며 상담을 해나가던 어느 날, 그녀는 쉴 새 없이 찾아오는 타로 내담자의 발걸음을 돌연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상담 때마다 사용하던 타로 덱을 땅에 묻고 정화하는 의식을 진지하게 치르며 '상담 종료'를 선언해 버렸다. 개인 피로감이 극도로 높아졌기 때문에 타로 상담을 무기한 쉬겠다는 것이다. 충격과 아쉬움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내담자로 북적이던 자취방은 어느새 나와 친구 둘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평화를 되찾았다.


고요한 평화도 그저 잠시, 그 친구가 없는 시간의 자취방으로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 타로 인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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