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역사의 격류 속, 맞잡은 두 손의 온기
코믹함을 넘어선 거장, 유해진의 100%를 보다
아침에 본 영화의 여운이 저녁까지 짙게 맴돈다. 시간이 지나면 감동이 퇴색될 법도 한데, 되새김질을 할수록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도무지 초점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치는 건 단연 촌장 역을 맡은 유해진 배우다. 보통 연기 경력이 오래 쌓이면 자신을 완전히 쥐어짜 내는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연기력의 100%를 아낌없이 발휘했다. 과거에는 친근하고 코믹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갔다면, 이제는 극 전체의 무게중심을 묵묵히 잡아주는 '대배우'의 반열에 올랐음을 증명했다. 얄미운 듯하면서도 누구보다 마을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리고 앞장서 노력하는 촌장의 모습.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끈끈한 리더십이 영화 속 수많은 배우들의 '케미'를 극대화하는 든든한 구심점이 되었다.
정답 없는 역사, 그리고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본 비극
이 영화의 또 다른 묘미는 뻔한 역사적 공식을 통쾌하게 깼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극에서 간사한 지략가로 묘사되던 한명회를 무겁고 진중한 풍채의 유지태가 연기한 것은 무척 신선한 충격이었다.
역사에 정답이 있을까?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 역시 결국 힘으로 권력을 쥐었던 이들이다. 이른바 '정통성'이라는 명분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그 알량한 핏줄의 논리가 덧없게만 느껴진다. 영화는 승자의 기록 대신, 비극적인 역사의 희생양인 단종과 그 곁을 지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맞춘다. 왕위를 빼앗긴 어린 왕의 고뇌, 헌신하는 신하들, 그리고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부모의 절절한 마음. 고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비의 입장이 되다 보니, 그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나는 끈끈한 '가족애'와 '인류애'가 유독 뼈저리게 다가왔다.
나이가 들수록 좁아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반성
영화를 보며 문득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 부부의 삶이 떠올랐다. 가난했던 젊은 날을 넉넉한 마음으로 견뎌내고,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정서적 지지를 나누며 단단한 인맥을 쌓아온 그들. 나는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어느덧 마흔여섯, 직책과 사회적 체면이 생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인간관계에 까다로워졌다. 내 취향과 주관이 뚜렷해지면서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은 피하게 되고,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핑계로 만남의 폭을 좁혀왔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주변에 마음까지 넉넉하게 베풀고 살았는지 돌아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우리는 모두 역사의 거대한 격류 앞에서는 그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소시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물살 속에서도 곁에 있는 누군가와 기꺼이 손을 맞잡을 수는 있다. 장항준 감독 부부처럼, 경제적인 이해득실을 떠나 주변에 온기를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깊은 반성이 밀려왔다.
자극 없이도 천만을 꿈꾸게 하는 힘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공포, 잔인함, 기괴함 등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작품들이 넘쳐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그런 인위적인 피로감이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달랐다. 악의로 똘똘 뭉친 평면적인 악역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자극적인 장면도 없다. 그저 저마다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단조로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잊혀졌던 정(情)과 인간다움을 길어 올려 기어코 관객의 눈물샘을 터뜨린다. 이 영화를 'N차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 무해하고 따뜻한 위로 덕분일 것이다.
관객 수 700만을 넘어 천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소식이 참으로 반갑다. 앞으로도 뻔한 흥행 공식을 깨고, 감독의 빛나는 연출력과 훌륭한 시나리오, 그리고 배우들의 숨겨진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런 '웰메이드' 영화가 우리 곁에 더 많이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별의별 교육연구소 김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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