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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모든 것 04

무제

by bluepeace


그 이후로,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조차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했다.


그가 나를 안고 있어도

어딘가에서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몸 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릴 때마다

나는 숨을 얕게 쉬는 법부터 배웠다.

말을 삼키는 법, 표정을 지우는 법,

기대하지 않는 법까지.


그 남자는 달랐다.

목소리를 낮췄고,

결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언제나 “괜찮아?”라는 질문을 먼저 건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안정을 배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정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너무 편안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걸

나는 너무 일찍 배워버린 사람이었으니까.



그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는 늘 선택 앞에서 멈칫했고,

나를 향한 말 한마디조차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굴려 본 뒤에야 꺼냈다.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


그는 늘 스스로를 단속했다.

혹시 내가 아버지의 그림자를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는

원할 때도 멈췄고,

붙잡고 싶을 때도 손을 늦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한 발 물러설 때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의 배려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안의 오래된 결핍은

그걸 거절로 받아들였다.


“왜 더 다가오지 않아?”


말로 꺼내지 못한 질문이

몸 안에서 계속 부풀었다.


나는 사랑을 증명받고 싶었다.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그가 나를 선택하고 있다는 확신을

매 순간 확인받고 싶었다.


그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침묵은 신중이었고,

나의 불안은 오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너무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넌 항상 한 발 뒤에 있어.”


내 말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말이 나오는 순간,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가 다칠까 봐.”


그 말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다치지 않으려고

평생을 웅크리고 살아온 사람에게

그 말은 너무 잔인했다.


“나는 이미 다쳤어.”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넌 그걸 몰라.

아니, 알면서도 피하는 거야.”


그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많이 안았고

더 적게 믿었다.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더 세게 붙잡았지만,

그만큼 숨이 막혔다.


그는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웠고,

나는 그에게서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


우리는 같은 공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안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절제였고,

나의 사랑은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점점 더 우리를

가까이에서 갈라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이 사람을 원하는 건,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주는 ‘안전’일까.


그리고 그는

밤마다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이 여자를 지키는 게,

사랑일까.

아니면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는 방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의 결핍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서로를 치유하는 동시에

서로의 가장 오래된 상처를

끝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도망칠 수 없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다음 선택은

사랑을 더 깊게 만들거나,

아예 부숴버릴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은

이미,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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