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
그 이후로,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조차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했다.
그가 나를 안고 있어도
어딘가에서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몸 안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릴 때마다
나는 숨을 얕게 쉬는 법부터 배웠다.
말을 삼키는 법, 표정을 지우는 법,
기대하지 않는 법까지.
그 남자는 달랐다.
목소리를 낮췄고,
결정을 강요하지 않았고,
언제나 “괜찮아?”라는 질문을 먼저 건넸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듯 안정을 배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정이 깊어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너무 편안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진다는 걸
나는 너무 일찍 배워버린 사람이었으니까.
⸻
그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는 늘 선택 앞에서 멈칫했고,
나를 향한 말 한마디조차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굴려 본 뒤에야 꺼냈다.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
상대를 몰아붙이지 않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
그는 늘 스스로를 단속했다.
혹시 내가 아버지의 그림자를 닮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는
원할 때도 멈췄고,
붙잡고 싶을 때도 손을 늦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
나는 그가 한 발 물러설 때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의 배려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 안의 오래된 결핍은
그걸 거절로 받아들였다.
“왜 더 다가오지 않아?”
말로 꺼내지 못한 질문이
몸 안에서 계속 부풀었다.
나는 사랑을 증명받고 싶었다.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그가 나를 선택하고 있다는 확신을
매 순간 확인받고 싶었다.
그는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의 침묵은 신중이었고,
나의 불안은 오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너무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
어느 날 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넌 항상 한 발 뒤에 있어.”
내 말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말이 나오는 순간,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가 다칠까 봐.”
그 말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다치지 않으려고
평생을 웅크리고 살아온 사람에게
그 말은 너무 잔인했다.
“나는 이미 다쳤어.”
내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실히 떨리고 있었다.
“넌 그걸 몰라.
아니, 알면서도 피하는 거야.”
그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
그날 이후,
우리는 더 많이 안았고
더 적게 믿었다.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더 세게 붙잡았지만,
그만큼 숨이 막혔다.
그는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웠고,
나는 그에게서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
우리는 같은 공포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안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절제였고,
나의 사랑은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점점 더 우리를
가까이에서 갈라놓았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이 사람을 원하는 건,
그 자체일까.
아니면
이 사람이 주는 ‘안전’일까.
그리고 그는
밤마다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이 여자를 지키는 게,
사랑일까.
아니면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는 방식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떠나지 못했다.
서로의 결핍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서로를 치유하는 동시에
서로의 가장 오래된 상처를
끝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도망칠 수 없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다음 선택은
사랑을 더 깊게 만들거나,
아예 부숴버릴 거라는 걸.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은
이미,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