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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벌새 Dec 27. 2020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로 되는 영화가 있다는 것

벌새 리뷰, 스포 주의

 단조로운 일상이 있었던가. 괜찮은 하루는 있어도 그 하루들이 연달아 이어지는 것 같진 않다. 괜찮은 하루들이 사흘 연속으로 이어지는 날은 과연 있었나 싶다. 스트레스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긴장과 불안의 감정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터질 듯 말 듯, 터질 듯 말 듯. 차라리 울어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런 뭉뚱함 속에서도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안도하며 그렇게 한 달을 지냈다. "귀한 시간 내어 인턴으로 지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회에는 아쉽게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턴 불합격 문자가 촉매제가 되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으면서 이 지긋지긋한 스트레스도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나 보다. 그래도 불합격 문자 덕분에 울었다. 울고 나면 기분이 훨씬 괜찮아지면서도 켭켭이 쌓아둔 감정들을 오롯하게 느끼는 그 순간은 항상 힘들다. 또, 외롭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공허함을 느끼는 와중에 문득 이 대사가 떠올랐다. 되뇌는 것만으로 위로를 주는 대사. 그리고 그런 영화가 있다는 것. 그 대사 한 줄이 듣고 싶어 며칠 전 벌새를 다시 보았다.


 '저는 제 자신을 견딜 수 없던 밤들에 벌새를 썼습니다.' 벌새는 누군가의 일기를 모아 만든 영화 같다. 감독님의 일기장이 은희의 하루가 되고, 우리는 은희의 하루를 보며 또 다른 은희가 된다. 세상의 모든 은희 중 하나가 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이 마지막 대사를 오롯이 느끼기 위해 2시간 20분가량의 긴 러닝타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삐삐, 한문학원, 베네통 노란 가방. 99년생인 내겐 낯설게 다가온 1994년, 영화의 도입부. 이내 기시감을 느끼긴 했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기에. 울퉁불퉁한 세상에 적응을 마친 어른들은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은희에게 생채기를 남긴다. 본인의 흉터와 비슷하게 생긴 생채기를.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오른쪽 왼쪽도 몰라" "감자전 있으니깐 먹어. 오빠 학원에서 오면 밥상 차려주고" 때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와 비슷한 생채기를. "은희야 너 날라리가 되면 안 돼. 공부 열심히 해서 여대생이 돼야 해. 그래야 무시도 안 당하고, 영어 간판도 잘 읽고, 캠퍼스에서 가슴에다 책 딱 이렇게 끼고 돌아다니지. 응?" 그리고 우그러지기 시작한 영혼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너 아까 그 새끼 누구야? 다 봤어. 부모님 망신시키지 마라." "얘네 아빠 미주 상가에서 일하세요" "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그럼에도 상처가 아물고 울퉁불퉁한 세상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마음을, 온기를 나눌 사람이 있기에. "저도 이상하게 병원이 집보다 더 편한 것 같아요." 다만 나쁜 일들이 일어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하기에. "엄마, 엄마 외삼촌 보고 싶어?" "그냥 이상해." "뭐가?" "니네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누기에.


"엄마 문 열어줘. 엄마아. 엄마 문 열어줘 나 왔다고. 아 엄마 장난치지 마 나 왔단 말이야. 엄마!!" "엄마! 엄마아! 엄마아아! 엄마아!! 엄!!마!!" 은희의 공허한 외침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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