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벽한 산골에 살다 보니 가끔 이런저런 후회를 하게 된다. 아직도 대처 삶을 다 버리지 못한 탓이리라. 산중 낭만을 외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가지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산골이라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망증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년에 찾아오는 건망증이란 놈이 여성 전유물인 줄 알았다. 영화, 드라마 그리고 책 탓이다. 설령, 남성에게 찾아와도 나만은 아닐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듯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란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이 증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을 터인데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이런 행동들이 건망증이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인덕션 걱정에 되돌아오기. 머리에 안경을 걸친 상태에서 안경 찾아 헤매기. 쓰레기 버린다고 면소재지까지 내려가 계획에도 없던 라면만 사고 쓰레기봉투는 되가져 오기. 기타 배우러 간다고 내려가면서 정작 기타는 집에 두고 가기 등.
여기까지도 정상은 아니지만, 증상이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짝지 만나러 간답시고 고속도로를 올라타 반대방향으로 달리기다. 이 경우는 앞서 예로든 경우와 다르게 조금은 후유증이 남는다. 우선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하니 신뢰 점수가 깎인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말하자니 “그쪽에 누구 있어? “라는 소리 나올까 봐 궁색한 핑계로 둘러댄다. 결국 말이 꼬여 실토하고 망신살만 뻗친다. 뭐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증상이 심각한데 자꾸만 반복되는 일이 있다.
샤워할 목적으로 발가벗고 욕실에 들어가 세수만 하고 나오기다. 이 경우는 말 그대로 대략 난감이다.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후유증도 깊어 어떤 날은 그 충격으로 온종일 그 상태로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산골이라 다행이다. 건망증으로 인해 사고가 나도 피해가 혼자로 그칠 것이고, 큰 사고로 확산될 가능성도 적다. 그리고 워낙 외진 곳이라 이 민망할 일들을 남들이 알아채지도 못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이유로 다행이다, 라고 자족하자니 자신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상상해보자. 끔찍한 일이다. 혹시 건망증이 의심되거나, 그 일이 남에게 해가 될까 걱정되는 소심한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산골 행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