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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r 17. 2022

일상적인 폭력에 여성들은 안전한가

영화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2019)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나는 보통 그 영화를 두 번 이상 관람하는 편이다. 처음엔 영화를 감상하는 자세로 스토리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보고, 두 번째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분석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영화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Never Rarely Sometimes Always)>(엘리자 히트맨, 2019)도 두 번 보았고, 다시 보았을 때 같은 영화지만 전혀 다른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을 느끼고 당혹스러웠다.      


   처음 보았을 때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그저 답답하고 안쓰러웠다. 미국 시골의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방치되다시피 한 십 대 소녀들이 위태로워 보였고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 정도 떠올렸다. 하지만 두 번째로 볼 때는 영화를 보는 내내 화가 치밀어서 참고 보기가 힘들었다.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연민의 감정이었다면 다음엔 분노였다.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주인공은 펜실베니아주 시골 마을에 사는 17세 소녀 오텀이다. 학교 발표회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는 오텀은 짙은 무대화장을 하고 나왔어도 영락없는 학생이다. 그녀의 공연은 남학생의 짓궂은 장난(이 표현은 너무 완곡하다. 성희롱 발언이라고 해야 맞다)으로 중단되지만, 그곳에 자리한 누구도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선생과 학생들, 학부모들 앞에서 그녀는 혼자 이 모욕을 오롯이 견뎌야 한다. 그녀가 겨우 이어서 노래를 마치자 그녀의 부모를 포함한 관중들은 박수를 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분위기다.    

 

   수치스럽고 굴욕적인 상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골의 가난한 십 대 소녀들에겐 일상이다. 오텀이 사촌이자 절친인 스카일라와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는 호의를 가장한 손님의 치근덕거림이 빈번하고 윗사람의 성추행은 아예 노골적이다. 가정 안에서도 아빠의 성적인 농담과 언어폭력을 수시로 들어야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희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스스로 경계하고 피하거나 추행을 당하고도 적당히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어른들은 무력한 방관자거나 혹은 악질의 가해자였다. 믿고 의지할 데라곤, “남자였으면 할 때 없어?”라는 질문에 “항상 그렇지.”라고 답하는 서로밖에 없다.      


   여성이라서 늘 긴장하고 방어적으로 살아야 하는 건 비단 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성이라면 누구나 수치스러움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외부의 위협을 경험하거나 목격했을 것이다. 매번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기에 영화 속 소녀들처럼 속으로 삼키고 애써 잊으려 했던 일들도 많았을 것이다. 너무나 만연한 폭력은 분노보다는 무력감과 체념을 낳는다. 그래서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여성인 나조차도 이 같은 상황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한 장면들을 나도 모르게 외면했고 깊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철저히 관객, 관찰자, 제삼자의 관점에서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보았다. 오텀이 처한 상황은 타인의 고통이고 슬픔이었다. 그래서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으로 인내하는 오텀을 안쓰러워만 했지 함께 분노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보았을 때야 비로소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이 어린 여성(혹은 여성 전체)에게로 향하는 폭력적인 시선과 언행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영화가 아팠고 힘들었다.      



   영화는 또 다른 차원의 폭력도 다루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오텀은 동네 산부인과를 찾는다. 여의사는 그런 오텀에게 다짜고짜 낙태 반대 영상(‘가혹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틀어주고 출산 입양을 권한다. 정작 본인의 입장이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낙태는 태아를 살인하는 것이라며 설득하려 한다. 상냥한 말투지만 의사 결정을 강요하는 일방적인 소통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낙태를 결심한 오텀이 스카일라와 동행하여 임신중절이 합법인 뉴욕주의 병원을 찾았을 때도 병원 앞에서 어느 종교단체가 낙태 반대 시위를 한다. 태아의 생명권만을 중시하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무시하는 이런 발언과 행위도 일종의 폭력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폭력’이라는 말의 외연은 가급적 넓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폭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390) 이 영화는 타인에게, 여성에게, 청소년에게 섬세하기를 포기하고 내비치는 일상의 ‘폭력’에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의 제목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는 낙태 수술 전 오텀이 심리 검사를 받을 때 나오는 설문 항목이다. 이성 관계와 성생활에 관련된 무척 사적인 질문들에 사지선다형 답을 골라야 한다. 당황한 오텀이 “이런 걸 왜 물으시는데요?”라고 묻자 상담사는 “환자분이 안전한지 확인하려는 목적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순간 그때까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오텀이 무너진다. 영화에서 오텀이 감정을 드러낸 유일한 장면이다. 그녀의 망설임과 울먹임이 대답이 아닐까. 언제 어디에서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떤 답을 고를 수 있을까. 저 네 가지 보기 중 하나로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오텀이 한 번쯤 크게 울어라도 봤으면, 사촌 스카일라에게 기대어 위로라도 받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끝끝내 감정을 터트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텀의 지친 얼굴을 비추며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쉽게 해소되지도 위로받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리라. 다음에도 이들은 온전히 혼자서 견디거나 연약하고 위태로운 또래의 연대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텀의 결정을 지지하고 묵묵히 곁을 지키는 스카일라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안일한 건지도 모른다. 이들이 나누는 도움이란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온기를 전하는 정도이니 말이다. 여성들은 안전한가, 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제출해야 할지 모르겠는 현실이 참담하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면서 느껴야 할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 분노여야 마땅하다.   


영화 <전혀아니다, 별로아니다, 가끔그렇다, 항상그렇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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