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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pr 01. 2023

성장이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내딛는 걸음이다

영화 <아마겟돈 타임>(제임스 그레이,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_ 헤르만 헤세, <데미안>
     

<아마겟돈 타임>은 1980년 뉴욕 퀸즈를 배경으로 백인 소년 폴 그라프의 성장을 그린 영화다. 성장은 점진적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어느 결정적 시기를 거치며 돌연 비약하기도 한다. 영화 초반의 폴과 마지막 장면의 폴이 같은 인물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듯, 폴은 기존의 순수하고 안전했던 유년 세계가 깨지는 순간을 경험하며 고투한다. 그리고 무겁게 어둠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마치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는 ‘아마겟돈’처럼 폴의 유년 시절이 끝나는 순간을,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폴은 담임의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려 학급 친구들에게 웃음을 주는 밝고 자유로운 아이였다. 흑인이고 가난한 유급생인 죠니와도 거리낌 없이 친해진다. 폴은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죠니의 꿈을, 죠니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폴의 꿈을 순수하게 응원한다. 하지만 순수함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과 경계가 맞닿아있다. 흑인은 나사(NASA)의 뒷문으로도 들어갈 수 없고, 예술은 취미 삼아 하는 일이지 직업이 될 수 없다는 말들이 폴의 귀에 들리기 시작한다. 호기심에 피웠더라도 대마초는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도, 학교 컴퓨터를 훔치는 일은 심각한 범죄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폴은 편견과 차별이 가득한 사회의 냉혹함과 유대인 이민자 출신 부모의 나약한 위상, 그리고 자기 자신의 비겁함 등 세상의 어두운 면을 두루 겪는다.     


죠니와 함께 벌인 절도 사건에서 폴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혼자 처벌을 면한다. 폴의 아버지는 폴에게 친구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것이라며 행운이 찾아왔을 때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조언은 냉철한 현실 인식이지만 한편으론 가혹하다. 폴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사히 빠져나와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불운한 죠니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웠을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사립학교 교장의 엘리트주의에 젖은 연설을 듣던 폴이 파티장을 성큼성큼 빠져나오는 장면은 폴이 현실에 안주하지는 않았으리란 걸 암시한다. 아마도 폴은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의 조언처럼 과거를 잊지 않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되었으리라.      


세상의 이치를 아프게 깨닫는 폴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데미안>(헤르만 헤세)의 싱클레어가 떠올랐다. 소설에서 싱클레어는 가족의 품이라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바깥 세계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한다. 싱클레어는 유년의 끝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며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아시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폴의 성장 이야기를 씁쓸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 담아냈다. 성장이란 안온한 세계를 깨고 나오는 투쟁이기에 아프고, 자아를 찾는 과정이기에 아름답다.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데미안이라면, 폴에겐 폴의 할아버지(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있었다. 그는 폴에게 삶의 이상적인 지침을 내려주는 안내자다. 두 사람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격 없이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장면들이 이 영화를 한층 아름답게 기억되게 만든다.


<아마겟돈 타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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