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코리쉬 피자>(폴 토마스 앤더슨,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코리쉬 피자>는 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청춘의 무모하고 풋풋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공감 포인트는 누구에게나 ‘무모하고 풋풋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일 테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경계에서 방황하던 시절이랄까. 청소년의 세계는 한심하고 유치한데 살짝 맛본 성인의 세계는 실망만을 안겨주던 그런 시기. 학생도 아닌데 그렇다고 변변한 직업은 없어서 내 상태를 무어라 정의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한때 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개리와 알라나는 개리의 졸업사진 촬영장에서 처음 만난다. 열다섯 살의 개리는 아역배우 출신이지만 더는 작고 귀엽지 않다. 일찍부터 어른의 세계를 접하며 허세와 능청스러움을 겸비한 그는 열 살이나 많은 알라나에게 먼저 대시한다. 알라나는 스물다섯 살이지만 딱히 야망도 꿈도 없이 포토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삶이 정체된 듯할 때 어리지만 치기 어린 개리의 모습은 그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후 둘은 매니저(보호자)와 배우로, 매트리스 판매 사업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모호한 관계를 유지한다. 다투고 멀어졌다가도 무슨 장력이라도 작용하듯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 둘의 밀당이 이 영화의 묘미다.
영화엔 두 사람이 거침없이 달리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개리가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갇혔을 때, 알라나가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떨어졌을 때, 그리고 마지막에 둘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될 때. 어렴풋이 그 시절의 사랑은 이처럼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인가 싶어 미소를 짓게 되지만, 동시에 그 무모함이란 돌이켜보면 민망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마냥 따뜻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십 대의 개리 일행과 어울리는 자신이 한심해 보이는지를 묻는 알라나의 모습은 이러한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해준다. 알라나는 고민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리에 멈춰있는가, 혹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는가.
‘후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이쯤에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언급해야겠다. 바로 기름이 떨어진 트럭을 알라나가 과감하게 내리막길을 따라 후진으로 몰고 내려오는 장면이다. 조수석의 개리는 그저 천진난만하게 알라나의 운전 실력에 감탄하지만, 그 순간 알라나는 사태 해결을 위해 무척 예민하고 긴장한 상태였으리라. 어른이라면 말렸을 무모한 시도, 그러나 덕분에 연출된 대담하고 통쾌한 성공. 그 어렵다는 내리막길 후진을 알라나는 참 멋들어지게 해낸다. 어쩌면 그 시절의 행보란 이렇듯 한참을 뒤로 물러나는 듯하더라도 핸들만 스스로 붙들고 있다면 괜찮은 건지도 모르겠다.
개리를 벗어나기 위해 알라나가 선택한 정치인의 선거 캠프도, 할리우드 배우들의 세계도 유치하고 실망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결말처럼 개리의 핀볼 게임장이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한때 미성숙한 채 방황하더라도 사랑 앞으로 무모하게 달려가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날은 어차피 미지수고 현재에 충실한 선택이 그래도 진실하니까. 그리고 진실 편에 서는 게 청춘의 용기니까.
<리코리쉬 피자>는 영화의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깊이 빠져들게 되는 영화라고 한다. 제목인 ‘리코리쉬 피자’는 LA에 있던 LP 판매 체인점 이름이며 70년대의 주옥같은 노래가 OST에 대거 쓰였다는 사실, 그리고 개리 역의 배우 쿠퍼 호프만은 그 유명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아들이고 알라나 역의 알라나는 하임 밴드의 멤버라는 것, 조연으로 출현한 숀 펜과 브래들리 쿠퍼 등이 연기한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영화에 흩어진 조각들을 맞춰갈수록 이 영화는 마치 그 시절의 영화, 음악, 문화에 바치는 한 편의 헌정 영화 같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더라도 영화가 발산하는 청춘의 기운, 시절의 향수에 누구나 마음 한편이 울리는 느낌을 받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