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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r 05. 2023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로 소설을 쓰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면 인물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제 아버지가 되겠죠. 나는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을 겁니다. 분명 그를 미화했겠죠. 많은 것들을 미화했을 거예요. (...)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버지의 삶을 전혀 나타내고 있지 않아요.”_ 아니 에르노 인터뷰, [옮긴이의 말] 중에서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1984BOOKS, 2021)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창비, 2022)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화자의 기억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구술하는 형식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확인된 사실의 글쓰기, 가치에 대한 판단을 철저하게 없앤, 현실에 가장 가까운, 정서를 벗겨낸 글쓰기.’(<진정한 장소>, 1984BOOKS, 2021) 그래서 이 책은 딸의 ‘자리’에서 아버지와 그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쓰였음에도 아버지의 죽음과 이후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이 시종일관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남자의 자리>의 원제는 ‘자리(La place)’다. ‘자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남자의’는 번역 과정에서 아버지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덧붙여진 수식어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남자의’ 자리로 국한해서 이해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이자 상인, 촌사람, 그리고 물질적인 세계로만 이루어진 ‘아버지의/남자의’ 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이와는 차별화되는 문학 교수이자 작가, 교양있는 도시인, 언어라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딸의/아니 에르노의’ 자리가 대비되며 서술되기 때문이다. “책, 음악, 그런 건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내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 없어.” 아버지의 이 말을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격차가 있음’(<진정한 장소>)을 나타내는 문장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p.19)고 생각했을까? 단지 아버지와 자신의 다름을 설명하고 싶어서 아버지가 속한 계층의 삶의 방식을, 아버지 삶의 순간순간을 세세하게 기록했을까?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나는 추측한다.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며 다르지만 닮기도 한 아버지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불화했던 그 세계와 화해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또한 시골의 잡화점/카페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을 행복이자 수치(소외)로 기억하는 자신의 모순을 스스로 설명해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자리는 작가가 떠나온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과거, 즉 ‘뿌리’가 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쓴 <남자의 자리>, 치매를 앓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쓴 <한 여자>,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세월>까지 - 어쩌면 작가가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한 끈질긴 노력이었으며, ‘근원적인 가치를 되찾는 일’(<세월>, 1984BOOKS, 2021)의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얻은 결론은 글쓰기가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라는 것이다. (<진정한 장소>) 




   <남자의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장르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인생을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p.20)으로 미화하는 것은 ‘일종의 배신’(p.104)으로까지 느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만약 이 책을 소설로 썼다면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렸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면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초상화’보다는 ‘사진’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그것도 연출이 가미되지 않은 스냅 사진. 초상화는 배경이나 장식을 통해 의도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상을 미화하지만, 스냅 사진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데 머문다. 그래서인지 책에는 유독 사진에서 출발한 회상이 많다.      


“쉰 무렵의 그는 여전히 혈기 왕성하다. 고개는 꼿꼿하고, 마치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 걱정하는 얼굴이다. 옷을 한 벌로 입었다. 짙은 색깔의 바지와 셔츠 그리고 넥타이 위에 밝은 색깔의 재킷. 일요일에 찍은 사진이다. 주중에는 작업복 차림이었으니까. (...)나는 그의 옆에 있다. 펄럭이는 원피스에 쭉 뻗은 팔은 나의 첫 자전거 핸들을 잡고 있으며, 한 발은 땅에 내딛고 있다. (...) 배경으로 카페의 열린 문, 창가의 꽃, 그 위로는 주류 소매 허가증이 보인다.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것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어떤 사진 속에도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은 없다.”(p.49)     


   한 귀퉁이가 닳고 닳은 흑백 사진 속에 아버지는 절대 웃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고 아직 어린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져 서 있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이 빈 공간을 기억의 조각들로 메우기 위해 글을 썼는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도 기차역 플랫폼 등 일상적인 장소에서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이자 자신도 모르게 힘 혹은 굴욕의 징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p.90)을 볼 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글로써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것을 머뭇거리며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p.90) 바라면서.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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