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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8. 2023

아버지의 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념이나 사상은 조금 거창하고 정치 성향 때문에 아버지와 반목하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종교 모임과 집회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때였다. 한 종교단체의 광화문 집회 참석자 사이에서 코로나가 집단 발병하자 정부는 같은 장소에서 집회를 가졌던 보수단체의 참석자들도 감염병 검사를 받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나는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집회에 다녀오셨으니 코로나19 검사를 받으시라 했고, 아버지는 이게 다 보수를 탄압하려는 정권의 횡포라 하셨다. 나는 고위험군인 아버지와 어머니, 아직 어린 손주들을 생각하시라 했고, 아버지는 코로나 검사는 집회 참가자 리스트를 만들고 계좌번호를 추적해 재산을 빼앗으려는 술책이라며 반박했다. (지금 생각하면 여기서 멈췄어야 했나 싶지만, 나는 기어코 한마디 말을 보태고 말았다.) 나는 단체 카톡으로 공유되는 편향된 뉴스만 보시지 말고 TV를 보셔라 했고, 아버지는 급기야 내겐 역사적인 유물이나 다름없는 ‘빨갱이’를 입에 올리셨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빨갱이란 말인가, 나는 말문이 막혔고 아버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이후 다시 걸어도 신호음만 가는 핸드폰을 붙들고 망연자실 앉아 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나와 통화한 사람이 ‘나의 아버지’가 맞나, 내가 아는 아버지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고 자식 손주들에게 다정다감한 분인데…. 순식간에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그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병보다 무서웠던 거짓 정보와 정치 공작, 혼돈의 시기가 지나가고 팬데믹 4년 차에 접어든 지금, 우리 가족은 그날의 실랑이를 없었던 일로 기억에서 지우려 애썼고 관계를 서둘러 봉합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어떤 거리감 같은 것이 생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창비, 2022)는 베스트셀러 자리에 꽤 오래 머문 책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빨치산 아버지의 인생을 돌아보는 소설’이라는 책 소개를 들었을 때도 시대에 뒤처진 주제 같았고 나와는 접점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신랄한 유머와 진지한 성찰에 웃었다 울기를 반복하며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동시에 신기하게도 현실의 ‘나의 아버지’가 자주 떠올랐다. 나는 과연 아버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p.249)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p.32)고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p.42)이라는데, 나는 시대와 불화하는 아버지의 사정을 언제 물어보기라도 했었나? 이런 생각들이 그야말로 ‘하염없이’(p.62) 떠올랐다.     


   소설에서 ‘빨치산의 딸’(p.53)이라는 굴레로 아버지뿐만 아니라 세상과도 거리를 두며 살아온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사정을 알게 된다. 하나둘 찾아오는 조문객들은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무는 ‘어떤 순간의 아버지’(p.110)를 생생하게 대변한다. 그 속엔 긴 세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민중과 혁명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사회주의자 고상욱 씨’가 있었고,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p.102)며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신분 나이도 가리지 않고 만인의 사정을 들어주는 ‘오지랖 넓은 고씨’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은 ‘빨치산’이 아닌 아버지, 딸을 사랑한 ‘나의 아버지’(p.265)를 기억에서 건져 올린다. 그녀는 말한다. 죽음은 그래서 끝이 아니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p.231)이라고.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p.181)     


   소설을 읽고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의 투쟁을 모르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길은 없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아버지와의 진정한 화해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소설 속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도 ‘한 어깨에 두 짐을 지고’(p.260) 살아오셨을 것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대체로 그랬으니까. 그 버거운 짐을 지고 세상과 싸워온 세월이 아버지에겐 평생의 신념이 되었을 테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 시대의 불의에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p.70)일 뿐이고, 단지 세상이 빠르게 변해버린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아버지가 애틋하고 가까이 있어도 그립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의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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