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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07. 2023

현 우주의 내 모습이
최악의 '나'라 할지라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니엘스,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에 따르면, 다중우주(멀티버스) 속엔 무수히 많은 ‘나’가 존재한다. 인생에서 사소한 결정의 순간마다 갈라진 우주와 그 속의 다채로운 ‘나’들. 그렇다면 어딘가에는 화가인 내가 있고, 여행 블로거 혹은 사업가인 내가 있을 테고, 어쩌면 작가나 소설가인 나도 있을지 모른다. 어느 우주에선가 나는 자녀를 둔 엄마일 수도, 미혼의 직장인인 골드미스일 수도, 동성의 연인과 결혼제도 바깥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도 있겠다. 무병장수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단명하여 이미 우주의 먼지로 돌아갔을 확률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의 ‘나’라는 건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고 아등바등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 빌런인 ‘조부 투파키(스테파니 수)’처럼 결국 모두 사라질 텐데 “전부 다 부질없다(Nothing matters.)”는 허무에 빠지는 게 당연한 수순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기에 묘한 위안이 숨어 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이번 생은 망했어. 다음 생에는...”이라며 자포자기하듯 ‘다음 생’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다른 생’을 상상하는 게 조금이라도 낫지 않을까? 이를테면 다른 우주에서 더 나은 삶을 사는 내가 있다면 그것도 다행이다 싶고, 지금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떠올리면 현생의 내가 이 정도인 것만도 감사하다 싶으니 말이다. (적어도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는 아니니까.) 무엇보다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처럼 인생의 행로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중년의 나에게도 어떤 다른 가능성의 바다가 무한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멀티버스 속의 에블린




이토록 정신없고 복잡하고 B급 코미디가 난무하는 영화에서 따뜻한 위안을 얻는다는 게 가능하긴 한 이야기인가? 아마도 거대한 악 조부 투파키를 물리치는 게 힘의 우위가 아닌 ‘다정함(be kind)’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다정함은 에블린의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가 잔인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채택한 싸우는 방식이다. 그는 세탁소가 세금체납 혐의로 조사를 받는 와중에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세무조사관 ‘디어드리(제이미 리 커티스)’에게 쿠키를 구워다 선물한다. 흑화한 에블린과 그녀를 공격하려는 알파버스 사람들 앞에서도 대화로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가장 먼저 도태될 사람임이 분명해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디플롯, 2021)에서 저자들은 진화의 승자는 최적자가 아니라 다정한 자였다고 주장한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해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호모 사피엔스만이 번성하게 된 까닭은 바로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인 친화력’(p.29)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분명하며, 그의 쿠키는 쿵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싸우는 방식이다. (멀티버스 속 어느 우주에서 에블린은 쿠키로 쿵후를 배운다.)     

 

영화와 책을 연결해서 살펴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영화 속 웨이먼드가 수집하는 눈알(Googly eyes) 스티커의 의미다. 인간은 눈동자 바깥으로 ‘하얀 공막’(p.135)이 있는 유일한 영장류다. 이 하얀 공막으로 인해 우리는 상대방의 시선의 움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눈맞춤 빈도의 증가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한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결투에서 에블린이 이마에 눈알 스티커를 제3의 눈처럼 붙인 것은 다정함과 친화력을 무기처럼 장착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사실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딸 ‘조이(스테파니 수)’와 동일 인물이다. 딸 속에 깃든 괴물이 아니라 모든 우주를 겪고 혼란과 허무에 빠진 조이 자신이다. 조이를 그녀의 블랙홀 같은 베이글(세상 모든 것을 올려 붕괴한 베이글)과 자기 파괴 욕구로부터 구해내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했던 건, 바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이해하려는 다정함이었다. 낭떠러지라도 같이 추락할 용기, 내민 손을 붙잡아 줄 포용심, 각자의 우주가 충돌해 균열이 생기더라도 꼭 끌어안는 사랑. 가운데가 텅 빈 베이글이 아닌 속이 꽉 찬 쿠키가, 검은색 테두리의 동그라미가 아닌 하얀 공막의 눈알이 결국 세상과 맞서는 힘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에블린은 조이에게 말한다. 뭐든(에브리씽) 될 수 있고 어디든(에브리웨어) 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자신은 언제까지나 여기 - 지금의 웨이먼드와 조이 곁에 있고 싶다고.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것이 한 줌의 시간뿐이라고 한다면, 그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하겠다고. 현 우주의 내 모습이 수천, 수만의 다중우주 속에서 최악의 ‘나’라 할지라도 ‘지금-여기’ 내가 속한 현실의 우주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엔딩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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