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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an 09. 2023

낭만적 상상과 절망적 현실

구병모의 <니니코라치우푼타>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병모 작가의 단편 <니니코라치우푼타>는 2022년 ‘제16회 김유정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제목이 암기는커녕 발음조차 힘들다. 무슨 의미일까? 처음에 들었을 땐, ‘하쿠나 마타타’ (‘다 잘될 거야’라는 뜻의 스와힐리어)처럼 어떤 주문인가 싶었고,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아’ (하와이의 대표 물고기로 ‘돼지 소리를 내는 물고기’라는 의미)와 같이 특정 지역에만 사는 특이한 종(種)의 이름인 줄 알았다. SF 소설이라는 단서를 듣고서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떠올리며 외계의 무슨 행성 이름인가 했다. 이 모든 추측이 상당히 낭만적인 상상이었다는 걸 소설의 처음 몇 페이지만 읽고도 알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린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이었다. 40년 이후의 근미래가 배경이고 ‘니니코라치우푼타’가 외계인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SF 소설로 분류되겠지만, 흔히 생각하듯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크게 변화한 세계라기보단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분명히 맞닥뜨릴 앞일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지없이 우리에게 도착하고야 말 미래라고 할까. ‘국민 중위연령 61세의 초고령사회’, ‘생산 가능 인구 1인이 노인 1인을 부양하게 되는 사회’. 작가는 지금도 이미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돌봄의 문제와 노동력을 대체하는 기술의 문제를 시간상으로 약간 더 멀리 가져가 서술했을 뿐이다. 


   그제야 심사평의 몇몇 단어들이 돋을새김한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치매', '간병', '모정'. 이 세 단어의 조합에서 발생하는 한숨과 눈물은 시대가 바뀌어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미래에도 줄기세포고 신약 개발과 같은 은혜와 축복은 ‘일반인들한테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내려와주지는 않’(p.50)을 것이고, 눈부심이나 편리함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 없음’(p.29)이리라는 냉철한 인식. 낯선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낭만적 상상과 소설 속 절망적 현실 사이 괴리감이 컸다.  


   소설 속 화자는 CG의 발달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특수분장팀에서 환멸을 느끼며 일하면서도 요양원의 엄마를 부양하기 위해 노력한다. 화자의 엄마인 이유나진은 과거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지성과 교양을 갖춘 X세대이지만 치매를 앓고 있다. 소설은 특수분장사인 화자가 치매에 걸린 엄마를 위해 엄마가 어릴 적 만났다는 외계인 ‘니니코라치우푼타’를 현실에 구현해나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특수분장으로 애써 완성한 크리처를 엄마는 결국 알아보지 못하지만, 화자는 엄마의 유류품인 쪽지의 영화 목록에서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p.65)을 발견한다. 그 우주적인 존재는 자신이 분장팀으로 참여한 영화들에서 엄마가 조악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구병모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현실을 사는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여기 쓰인 모든 체념과 냉소가 빗나가기를, 전멸에 가까운 적멸의 언어가 무용해지기를 바란다.”(p.11)고 썼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문제의식과 비관적인 전망엔 공감하는 바지만, 시종일관 냉소적인 문장은 거북함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만사에 냉소적이기란 얼마나 쉬운가. ‘냉소는 세상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항복의 포즈다.’*라는 누군가의 표현이 떠오른다.  맹목적인 낙관주의도 무책임하나 체념과 냉소가 만연한 태도도 바람직하진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설 속에서 따스한 지점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건 아마도 이러한 문체가 주는 인상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니니코라치우푼타’를 다시 상상한다. 파편이 아닌 온 존재로 말이다. 이유나진 할머니의 기억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그 존재가 실재했을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있지 않은가. 이 상상은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이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보라와 녹색이 어우러진 외형의 외계인과 지구인 꼬마가 나란히 앉아, 둘 다 손이 있으니 마주 잡고 입이 있으니 웃으며 교감하는 모습은. 토마토 맛의 음료 브이팔을 처음 맛보고 꼬마의 얼굴에 뿜었다는 순간에선 피시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제야 비로소 ‘니니코라치우푼타’가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p.65)이 된 느낌이다. 어쩌면 비관적 전망밖에 없는 ‘하나의 시절 안에서 질식사하기 전에’(p.17)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냉소보다는 이런 상상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른다. 확정된 미래가 아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때,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에 불과했던 ‘니니코라치우푼타’가 내게도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p.65)


'제16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도서출판 강, 2022)




*칼럼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함께 있어요, 힘내요!’ (씨네21, 201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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