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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Dec 06. 2022

이야기가 된 삶은 중단되지 않는다

김연수의 <난주의 바다 앞에서>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정(손유미)이 정현에게 들려준 정난주의 이야기는 안내판에 적힌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결말 부분이 달랐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난주가 하느님께 올렸다는 기도(“제가 죽어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와 하느님이 고쳐주었다는 올바른 기도(“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에 대한 부분. 마지막 기도대로 난주는 그 후로 37년을 더 살았고 그녀가 추자도 갯바위에 두고 간 아들 황경한도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은정이 지어낸 이야기일까, 아니면 다르게 전해 오는 이야기를 섬 주민에게 들은 것일까?’(p.64)     




   김연수 작가의 단편 <난주의 바다 앞에서>(문학동네, 2022)의 정현은 소설가다. 추자도에는 한 중학교의 강연 요청으로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연이 깊었던, 그러나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겨 한동안 원망했던 은정을 만난다. 은정은 섬에 들어와 손유미로 개명하고 어릴 적 꿈이었던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도 이제 어엿한 소설가다. 정현의 정의에 따르면, 시나 소설을 쓰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일’(p.44)이다. 그렇다면 은정도 난주를 덮친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고통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지어 그녀의 인생사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동시에 아들의 죽음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섬까지 오게 된 자신의 불가해한 인생에도 어떤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려 한 게 아닐까?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소설가 쓰시마 유코는 다음의 물음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삶에서 큰 가지가 갑자기 잘려 나갔는데도 삶의 시간은 ‘어째서 중단되지 않는가’. 그녀는 이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소설을 써왔다고 소설집 <<묵시>>(문학동네, 2013) 첫머리에 고백하듯 적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슬픔에 대하여>에는 ‘슬픔’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넘어서는 상실의 고통(당혹스러움과 노여움, 자책, 무력감, 두려움, 고립감, 굴욕 등이 뒤섞인)과 그럼에도 남은 딸아이와 질긴 생을 이어가기 위한 고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작가는 죽은 아들이 작은 알갱이가 되어 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이를 부산스럽게 눈으로 좇는 어미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아이가 여기저기에 살아있기에 ‘나는 지금도 여전히 슬픔을 모른다’(p.187)는 마지막 독백은 거의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이의 심정이다.     




   ‘이야기가 된 고통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한다’(홍은전, <그냥 사람>. p.162)고 한다. 쓰시마 요코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가혹한 운명을 응시할 수 있었듯이, 은정도 정난주의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야’ 내 아들이 살 수 있다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내 기억 속 시공간을 초월한 그곳에서 아들은 언제까지고 살아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은정은 ‘거대한 푸른 벽’(p.45)과 같던 바다에서 그 너머의 삶을 발견했다. 끝까지 갔다는 생각이 들어도 결코 끝이 아니고,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져도 그다음이 있다는 것을.     


   김연수 작가는 절망과 비관 속에서도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세컨드 윈드(p.45)라는 체육 용어에 빗대어 풀어냈다. 세컨드 윈드는 운동을 중지하고 싶은 ‘사점(dead point)’ 이후에 오히려 고통이 줄어들고 호흡이 순조로워지는 상태를 일컫는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의 순간에 불어오는 두 번째 바람. 어쩌면 은정은 아이가 죽었을 때 이미 한 번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새 바람처럼 어디선가 들려온 난주의 이야기가 은정의 숨통을 틔워 ‘두 번째 삶’(p.64)을 열어주었던 것이리라. 이 너머의 삶은 정현이 강연에서 암송한 미야자와 겐지의 짧은 이야기 ‘목련’에 등장하는 험준함 뒤에 찾아오는 평평함과 닮아있다. 이제는 은정 안의 풍경이 푸른 벽과 같은 바다가 아니라 새하얀 목련 나무가 가득하기를, 그녀의 하루하루도 난주의 그것처럼 ‘늘 새 바람이 그녀 쪽으로 불어오는 나날’(p.66)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김연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이미지 출처: 추자도 정난주의 '눈물의 십자가' (visitje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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