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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Nov 19. 2022

우리의
일상에서 반복 재생되는 영화

영화 <풀타임>(에리크 그라벨,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풀타임>(에리크 그라벨, 2022)을 보며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단어는 ‘고단하다’였다. 쥘리의 삶이 참, 고단했다. 현대인 누구라고 그렇지 않겠냐마는 영화에 담긴 쥘리의 일상은 모든 순간이 그야말로 초읽기다.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파리 근교에서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다.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해서 말하면 그 안에 내포된 노동의 강도와 감정적인 고됨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겪어봐야만 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90분 풀-타임(Full Time)으로 쥘리의 숨 가쁜 일상을 몸소 겪게 만든다.  



    

쥘리는 현재 5성급 호텔의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중간 관리자 일도 가끔 도맡아 처리할 만큼 프로페셔널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직장 생활에 최근 크고 작은 구멍이 생겼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파리 대중교통 파업으로 인한 출퇴근 시간의 지연이고 다른 하나는 이직 준비로 인한 자리 비움이다. 두 번째 사유는 차치하고라도 교통 파업은 그녀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인데 직장 상사는 그녀의 잦은 지각을 문제 삼는다. 자기 일을 쥘리에게 떠넘길 때는 언제고 쥘리의 사정은 모르쇠다. 쥘리는 거의 매일 뛰어서 출근하고 대체 투입된 버스나 카풀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보느라 발을 동동거린다.   

  

자꾸만 늦어지는 퇴근 시간도 문제다. 그녀의 아이들을 맡아주는 노파는 이런 식으론 계속할 수 없다고 불평한다. 일시적인 문제라고 설득해보지만, 지금으로선 파업이 끝날 기미가 없다. 급기야는 파리에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생기자 노파는 쥘리의 아이들을 더는 맡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대안이 없는 쥘리는 사과하고 사정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노파는 ‘집과 가까운 직장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쥘리의 직장 동료가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라’고 했던 것처럼. 다들 말은 쉽다. 그 와중에 전남편은 양육비도 보내지 않고 연락 두절이다. 양육비는 그의 의무인데 왜 쥘리가 사정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쥘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것. 하지만 그 일(시장 조사원)이라는 게 그녀가 아이를 낳기 전 본래 가졌던 직업이라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출산과 육아로 여성이 직장에서 잃는 것들은 일일이 언급하기도 지친다. 쥘리의 인생이 ‘평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상화’될 때까지만 시련이 멈춰주면 좋겠지만, 그녀의 직장 상사는 쥘리의 이직 시도와 업무 태만을 알아채자마자 그녀를 해고한다. 길고 험한 채용 과정에 비해 해고는 쉽고 빠르다. 그녀의 '고단한' 삶이 이젠 '위태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배경 음악까지 초조함과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그녀의 삶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빠졌을 때, 최종 면접 합격 전화가 온다. 놀이공원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쥘리는 울음을 터트린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다행인데, 어쩐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안도와 기쁨에 더해 서운함과 허망함, 비애 등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눈물 같다. 게다가 관객의 오지랖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스럽다. 호텔보다 나은 직장이지만 더 바쁜 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될 테며, 아이들은 더 오래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과하거나 사정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아이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커질 것이다. 이것을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자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또는 배우자로 존재하는 한 “여자와 순교는 동행하기 마련”이라는 뒤라스의 말은 과장이라고 할지라도, “21세기 ‘신가부장제’만큼 우리를 비참한 수렁에 몰아넣는 것은 없다”는 데버라 리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어지는 글은 이렇다. “신가부장제는 우리에게 수동적이되 야심 찰 것을, 모성적이되 성적 활력이 넘칠 것을, 자기희생적이되 충족을 알 것을 요구했다. 즉 경제와 가정 영역에서 두루두루 멸시받으며 사는 와중에도 우리는 ‘강인한 현대 여성’이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만사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게 일상사였지만, 정작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알고 싶지 않은 것들>, p.25)   

   

쥘리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커리어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시대와 사회가 일과 가정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유독 가혹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누군가의 일상에서 이 영화는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심지어 공포스럽게 하는 건 그 사실인지도 모른다.          


     

영화 <풀타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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