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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Apr 16. 2023

스스로 선택한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는 것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스토너>(존 윌리엄스, 알에이치코리아, 2015)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윌리엄 스토너의 인생에 불운처럼 끼어든 존재들(워커, 로맥스, 이디스)에게 분개하며 그를 연민했었다.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채 고통을 감내하는 그가 답답하기도 했다. 소설의 마지막 그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게 허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내게 어쩐지 서늘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긴 책으로 기억됐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은 소설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스토너가 안쓰럽게 느껴진 장면들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생을 ‘실패작’(p.387)이라 부르기엔 망설여졌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p.353) 열정이라니, 같은 인물을 두고 하는 말이 맞나? 스토너는 ‘땅처럼 수동적이던 사람’(p.27)이고 삶에 무심한 듯 초연하게 살아간 사람이 아니었던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스토너는 군청 직원의 권유로 농과대학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내 영문학에 매료되어 전공을 바꾸고 학자의 길을 걷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다른 많은 학생이 참전할 때도 그는 학교에 남는다. 나중에 불이익을 받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기고 내린 결정이다. 이후 그는 40여 년을 미주리 대학에서 교육자로 살았지만, 조교수 이상의 자리엔 오르지 못한다. 그는 오만한 학생 워커의 공격과 학과장 로맥스의 집요한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교수의 자리를 지킨다. 암이라는 질병이 그를 정복할 때까지.     


   또한 그는 첫사랑 이디스와의 결혼을 강행하고 딸 그레이스를 얻는다. 그리고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자신의 선택을 무(無)로 되돌리진 않는다. 그 속에서 나름의 행복한 순간을 응시하고 조용히 불행을 인내하며 살아간다. 한편 그는 뒤늦게 찾아온 캐서린과의 사랑에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뛰어든다. 그리고 각자의 커리어를 위해 그 사랑을 포기한다. 그는 이 결정이 안겨준 좌절과 슬픔도 고스란히 견디며 남은 생을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스토너는 결정적인 시기마다 스스로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며 살았다. 때로는 고집스럽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게다가 그는 그 선택의 결과가 좋든 싫든 간에 꿋꿋이 감당해낸 사람이었다. 스토너는 평생을 문학과 대학이라는 지식의 세계에 머물기를 선택했고, 어떤 고난에도 타협하지 않고 그 선택을 고수했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를 회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묵묵히 실행하며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죽음을 앞두고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넌 무엇을 기대했나?’(p.388)라고 거듭 묻는다. 비록 모든 일이 그가 기대한 바대로 전개되진 않았지만, 삶의 가능성에 열정을 바쳐 살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스토너는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일은 하잘것없음을, ‘그는 그 자신’(p.391)으로 살았음을 깨닫는다. 스토너의 마지막 순간을 읽으며 나는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떠올랐다.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소설에서 두 번 반복된 이 문구는 삶과 문학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스토너의 삶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삶이란 ‘피할 수 없는 패배’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이 생각난다. 쿤데라는 이어서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밀란 쿤데라, <커튼>).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삶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앞에서 무력한 인간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을 이해하고자 열정적으로 노력한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렸다. 기대와 실망이 연이어 들고, 기쁨과 슬픔이 나란히 있는, 씁쓸한 동시에 아름다운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스토너라는 인물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대변한다. 이 소설이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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