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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May 01. 2023

자기 자신을 초월해 상승하는 감각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를 읽고

본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 일부와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무게가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감소한다고 했지? 느리지만 꾸준히.”
“맞아요. 매일 0.5킬로그램가량씩요.” (p.29)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고도에서>(황금가지, 2019)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없이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한 주인공이 결국 0kg에 수렴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를 오마주했다는 이 소설에서 장르 소설의 대가 스티븐 킹이 설정한 미스터리 장치는, 주인공의 몸무게가 꾸준히 0.5킬로그램씩 감소하는 와중에도 외형은 그대로라는 것이며, 그가 몸에 걸친 것이 무엇이든(옷, 부츠, 동전, 아령...) 중량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 더욱 미스터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모든 불가사의한 일에 당황하기는커녕 냉철한 인식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태도다. 소멸, 즉 죽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과연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주인공 스콧은 키 195cm에 몸무게 100kg이 넘는 거구이며 이혼 후 반려묘와 함께 사는 40대 중반의 남성이다. 웹사이트 제작자인 그는 주로 재택근무를 하는데, 최근 들어 이웃과 사소한 마찰로 불화를 겪고 있다. 그의 이웃은 마을에서 채식 식당을 운영 중인 레즈비언 부부 디어드리와 미시이고 그들은 보수적인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혐오에 상처를 입은 상태다. 스콧은 체중이 계속 줄어드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이들과의 오해를 풀고 관계를 개선하는 걸 최우선 과제로 여긴다. 결혼에서도 일에서도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기에 ‘죽기 전에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잡고 싶’다는 게 스콧의 속마음이다.


“이 일을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거죠? 제가... 우리가 당신네 남성성을 위협하기라도 하나요?”
‘아뇨, 이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내년에 죽기 때문이에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죽기 전에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잡고 싶으니까.’ (p.115)     


   스콧이 선택한 화해의 제스처는 달리기다. 마을 행사인 추수감사절 달리기 경주에 마라토너 출신인 디어드리가 식당 홍보를 위해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도 함께하기로 한다. 어이없게도 대회 승리를 놓고 그녀와 내기도 한다. 중량이 줄어 중력의 영향을 적게 받는 몸으로 그녀와 나란히 달리고,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 우승을 안겨준다. 중요한 건 승부가 아니었다. 디어드리의 마음을 연 것은, 상대방과 같은 자리에 서서 그를 이해해보려는 스콧의 시도 그 자체였다.     


   달리기는 스콧 개인에게도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경지를 선사한다. 달리다가 지친 순간, 그는 순풍이 불어오는 ‘러너스 하이’를 느끼고 이를 ‘고양’, 즉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더 멀리 상승하는 감각’(p.133)이라고 정의한다. 김연수 작가가 소설 <난주의 바다 앞에서>(2022)에서 언급한 ‘세컨드 윈드’(운동을 중지하고 싶은 ‘사점(dead point)’ 이후에 오히려 고통이 줄어들고 호흡이 순조로워지는 상태)와 같은 개념이다. 이는 누구나 마음을 열어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될 수 있’(p.188)다는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죽음을 앞둔 스콧의 심정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어떤 느낌이야, 스콧? 자네는 어떤 기분이 들어?”(...)
“고도에 오른 기분이 들어요.” (p.183)     


   마침내 몸무게가 영점을 찍은 스콧은 지면에 붙어있기가 힘들어진다. 스콧이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이고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상승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중력은 우리를 무덤으로 끌어내리는 닻이다.’(p.195)라는 소설에서 언급된 글귀와 반대로 그는 하늘로 떠오르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가 어느 정도 고도에 올랐을 때 품에 안은 색색의 폭죽이 불꽃을 터뜨린다. 이는 스콧이 벗들에게(디어드리와 미시 부부, 주치의이자 절친인 밥 부부) 고하는 작별 인사다.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불꽃은 그의 죽음에 어떤 초월적인 인상을 부여한다. 슬픔을 넘어 ‘고양’이라는 감각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결말이다.  

     

눈부신 불꽃이 그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서 불타올랐다. 빨강과 노랑, 초록의 불꽃이었다. 그리고 잠시 멎더니 곧이어 완벽한 황금빛이 폭발하면서 아른거리는 폭포가 쏟아져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p.202)     



     

   이 소설에서 몸무게가 줄어든다는 건, 욕심과 욕망, 집착과 불화 등으로 점철된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과정을 가시화하는 장치로 보인다. 0kg으로 수렴해 별들을 향해 솟아오르는 건, 별의 먼지에서 탄생한 우리가 영점으로 회귀하는 것이 곧 죽음임을 드러내는 은유로 읽힌다. 죽음을 하강이 아닌 상승으로, 어둠이 아닌 밤을 밝히는 불꽃의 이미지로, 슬픔이 아닌 고양의 감정으로 그린 것이 이 소설에 더할 나위 없는 온기를 준다. 뉴욕타임스는 <고도에서>를 두고 “킹의 전에 없던 상냥함”이라고 평했다. 공포와 서스펜스 소설의 경지에 오른 작가가 기묘하고 서늘한 소재를 한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로 승화시켰다. 이 소설이 독자에게 고양에 가까운 감각을 여운으로 남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고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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