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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l 20. 2024

자유도 미래도 없지만, 중요한 건 곰도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 <노 베어스>(자파르 파나히, 2022)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이란 국적의 두 연인이 있다. 한 커플은 튀르키예에서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 중이었고, 다른 커플은 감독이 임시로 머무는 이란의 국경 마을에 살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출국금지 명령을 받은 감독은 촬영장에 직접 가지 못해 2km 남짓 떨어진 이곳에서 온라인으로 영화를 디렉팅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독은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이들 커플의 운명이 죽음으로 귀결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박티아르와 자라는 10년째 튀르키예에 숨어 지내며 위조여권을 구해 유럽으로 이주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정확히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투옥과 고문, 추방을 당했다는 자라의 말을 미루어 짐작할 때, 이들은 이란 정부에 어떤 식으로든 반기를 들었다가 고난을 겪게 된 것 같다. 한편 솔두즈와 고잘은 마을의 악습으로부터 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도망갈 생각이었다.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미래 남편의 이름으로 탯줄을 자른다는 이 마을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고잘에게 다른 남자, 즉 야굽과 결혼하기를 강요했다. 보수적인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이들에게 누군가 피를 보게 될 거라며 위협했다.     


   “도시는 부패한 정부가 문제이고 우린 미신 문제가 있죠.”라는 어느 주민의 말처럼, 결국 두 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부패한 정부’와 ‘미신’이다. 그러나 파나히 감독은 자신과 자신의 카메라가 그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죄책감을 떨치기 힘든 듯하다. 자라는 자살하기 직전 감독의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사실을 근거로 영화를 찍겠다더니 전부 다 가짜라고 울부짖었다. 감독은 까맣게 몰랐던 일이지만, 박티아르가 자라 혼자라도 자유를 찾아 떠나길 바라고 가짜 위조여권으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남의 신분증으로 살게 된 거짓 인생과 억지 해피엔딩, 거기에 더해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그녀에게서 삶의 이유를 앗아가 버렸다.     


   솔두즈와 고잘의 일에는 감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하게 얽혀버렸다. 파나히 감독은 마을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사람들과 풍경 곳곳을 카메라로 찍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젊은 남녀의 사진을 찍었냐며 증거를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마을의 촌장까지 나서서 국가법, 이슬람법을 언급하며 압박하더니, 심지어는 마을 원로와 청년, 아이들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맹세까지 하게 한다. 맹세의 방으로 향하는 길, 곰이 있으니 위험하다고 했던 주민은 그에게 고백하듯 진실을 말한다. “곰 같은 건 없어요. 우리를 겁주려고 꾸며 낸 거죠. 세상에 두려움을 만들면 권력을 휘두르기 쉽거든요.”    

 

   이쯤 되면 테헤란에서 온 손님이라며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대하던 숙소의 간바르도 의심스러워진다. ‘발 씻기’라는 마을의 약혼식을 감독의 카메라로 대신 촬영하다가 겉과 속이 다른 그의 실체가 살짝 드러나기도 했는데, 이후의 행동들도 외지인이라고 보호하는 건지 감시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혁명수비대나 경찰로 대변되는 권력 앞에서 ‘곰한테 혀를 잘려서 말 못 하는’ 소시민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우린 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명예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엔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로 편을 가르는 단단한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촬영장을 박차고 나갔던 자라는 바다에서 익사체로 떠오른다. 신분을 확인한 박티아르가 오열하는 모습에서 감독의 카메라는 촬영을 멈춘다. 솔두즈와 고잘은 국경을 넘으려다 수비대에게 걸려 총살당했다. 감독은 혁명수비대의 체포를 피해 마을을 떠나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시신을 목격한다. 충격과 혼돈의 상황에서 안전벨트 미착용 경고음이 불안하게 울리다가 감독은 차량을 멈춰 세운다. 그렇게 영화도, 영화 속 영화도 모두 암흑 속에서 끝이 난다.  




   

   영화가 끝나고 내겐 두 연인의 슬픈 운명이 어쩐지 잇대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박티아르와 자라는 솔두즈와 고잘이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을 때의 미래 모습 같았다. 자유를 찾아 목숨 건 탈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에겐 10년 넘게 숨어 지내야 하는 위태로운 미래가, 어쩌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갇힌 느낌이 든대요. 자유도, 미래도 없는 곳.” 이런 상황에서 해피엔딩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건 가혹한 일이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한때 국경 마을에서 튀르키예로 연결되는 밀수업자의 길을 통해 망명을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카메라에 담긴 사람들을 등지지 않았다. 도피보다는 머물기를 선택한 그는 이란 내부의 부패와 불합리를 기록해 바깥세상에 알리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듯하다. 마지막에 마을을 황급히 떠나던 감독이 차량을 멈춰 세우는 장면도 비극을 그저 지나쳐 달릴 수는 없다는, 외면하지 않는 마음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감독이 망명의 기회를 거부한 것은 어쩌면 자라가 혼자 유럽으로 가길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미디어는, 카메라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할 수 있는지를 깊이 사유하게 하는 영화였다.                    


<노 베어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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