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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Nov 01. 2024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가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하마구치 류스케, 2023) 리뷰


'복잡한 생각과 세계의 시적 비전은 
지나치게 명명백백한 것의 틀 안에 끼워져서는 안 된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 <시간의 각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듯한 묘한 영화다. 서사를 처음부터 되짚어보아도 여전히 결말은 급작스럽고 난해하다. 나는 교묘하게 겹쳐지는 한 쌍의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이 모호하고 시적인 영화에 나름의 해석을 내려보려 한다. 


1. 영화의 시작과 끝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본 관객에게 각인된 장면은 아마도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아닐까 싶다. 다소 길게 느껴지는 오프닝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앵글로 빽빽하게 얽힌 나뭇가지를 비추며 이동한다. 가늘고 긴 가지들은 어쩐지 모세혈관처럼 느껴지며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다양한 종(種)의 나무들이 땅속 영양분과 수분을 나누어 갖고 햇빛을 나누어 받으며 공존하고 있다. 영화 속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일 테다.     


   엔딩도 비슷한 앵글로 숲을 보여주지만 이번엔 희미한 달빛에 의존한 채 어둠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꺼져가는 생명,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걸까. 오프닝에서 들었던 음악이 다시금 반복되는데 왠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르다. 타쿠미의 거친 숨소리가 겹쳐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의 갑작스러운 결말이 아직 관객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서이기도 할 테다.      



2. 상류와 하류

   영화의 표면적인 갈등은 청정한 자연 속에 터를 잡고 사는 산골 마을 사람들과 인근에 글램핑장을 건설하겠다는 연예기획사 사이에서 불거진다.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는 사장도 전문 컨설턴트도 없이 담당자들로만 구성해 사업 설명회를 개최한다. 돈벌이에 급급한 업체의 부실한 계획과 밀어붙이기식 추진, 정부의 보여주기식 행정,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 파괴 등등, 설명회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이 영화가 가진 사회 비판적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이라는 건 낮은 데로 흐릅니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줍니다. (...) 그럼 하류 사람은 상류를 비난하게 되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걸 방지하려면 상류에 사는 사람에게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글램핑장은 지리적으로도 상류에 위치해 정화되지 않은 오물을 하류의 마을로 흘려보내지만, 여기서 지적하는 건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 속에서도 도시의 편리함을 누리겠다는 ‘글래머러스+캠핑’이 의미하듯, 자본 우위에 있는 도시인은 계층적으로 상류를, 지역 주민은 하류를 차지한다.     

 

   타쿠미의 말에 따르면, 글램핑장이 들어서는 곳은 사슴이 다니는 길이다. 그러자 담당자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울타리를 치자고 한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라는 물음에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어딘가 딴 데로 가겠죠?”라는 답변을 내뱉는 타카하시. 하류는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자연의 연약한 동식물들도 하류의 구성원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충돌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다.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은 이제 글램핑을 즐기러 오는 도시인에 의해서도 밀려나게 생겼다.     



3. 하나와 사슴

   하나는 한 마리의 사슴 같다. 영화 내내 홀로 벌판을 자유롭게 누빈다. 또래 친구들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기보다는 새의 깃털을 찾는 보물 찾기나 사슴과의 숨바꼭질을 즐긴다. 그런 하나가 마침내 사슴과 마주쳤을 때, 비극이 발생한다.     


   하나는 사슴에게 다가가며 모자를 벗는다. 아빠 타쿠미가 설명회에서 발언 전에 모자를 벗었던 것처럼 자신을 소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필이면 하나 앞에 나타난 사슴들은 유일하게 공격성을 드러낸다는 총에 빗맞은 새끼 사슴과 그 아비 사슴이었다. 타쿠미는 실종된 하나를 찾은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눈앞에서 하나가 사슴의 공격을 받는 모습을 목격할 참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을 공격하는 사슴처럼, 타쿠미는 하나를 도우려던 타카하시를 공격한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관객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이 순간 타쿠미는 사슴에게 동화된 것일까? 타카하시의 손길이 도움이 아니라 위협으로 느껴졌던 걸까? 아니면 애초부터 타쿠미와 하나 부녀는 사슴에 더 가까운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사슴이 다니는 길은 하나가 뛰노는 공간이다. 하나와 사슴을 동일선상에 놓으면 여러 의문이 풀린다. 타쿠미가 총소리가 날 때야 잊었던 하나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도, 마지막 장면에서 다친 하나를 안고 달리는 방향이 마을이 아닌 숲인 것도.     


 

4. 자연의 개척자와 자연의 대리인 

   타쿠미는 자신을 ‘농지개척 3세대’라고 소개한다.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자르고 도끼로 장작을 패는 첫 등장 신에서부터 개척자임이 드러났다. 토지를 개척해 마을을 형성했으니 ‘어떻게 보면 모두가 외부인’이라는 그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누구의 관점에서 ‘외부인’일까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개척자인 타쿠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자연의 대리인으로 변모한 듯하다. 마을의 심부름꾼인 그가 이번엔 자연을 대신해 타카하시를 응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타카하시가 죽임을 당할 만큼 죄를 지었는가 하면 그렇진 않다. 어쩌면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는 타쿠미의 말처럼 이 지역의 자연과 마을 사람들이 애써 유지하고 있는 균형이 타카하시로 대변되는 도시인에 의해 깨지게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5. 선과 악

   영화 속에서 누군가를 해하겠다는 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한 사람은 없다. 약간의 이기심과 무책임함이 쌓여 결과적으로 악한 일이 발생할 뿐이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 글램핑장의 정화조 위치를 옮기지 않으면 마을의 우물이 오염되고 24시간 관리인을 두지 않으면 모닥불 화재를 예방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사슴을 도우려던 하나와 그녀를 구하려던 타카하시처럼 선한 행동의 결과가 예기치 못한 폭력(‘악’)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묻는다. 악은 존재하는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가?     


   고대 로마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한 장의 종이가 ‘선’이라고 가정할 때, 가운데에 동그랗게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렇듯 악이란 선의 부재 혹은 결핍인 구멍일 뿐 독립적인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어둠이 빛의 부재인 것처럼 말이다.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건 인간의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다. 선악을 재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쩌면 이 세계가 훨씬 더 복잡하게 작동하고 섬세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일깨우며, 인간 중심의 사고를 경계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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