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 디 아일>(토마스 스터버, 2018)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형마트를 종종 가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의식하진 않았다. 계산대에서나 한두 마디 말을 나눌까, 대체로 마트 노동자들은 소비자들의 눈에 거의 띄지 않는다. 보기 좋게 잘 정돈된 상품들 뒤에는 지게차로 물품을 옮기고 빈자리 없이 배열하고 소비기한이 지난 상품은 내다 버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곳이 누군가에겐 매일 출근하는 일터이자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하나의 작은 사회임을 영화 <인 디 아일(In the Aisles)>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영화는 독일 어느 대형마트의 야간근로자 크리스티안, 마리온, 브루노의 이야기를 세 개의 챕터로 구성해 그린다. 크리스티안은 신입 직원이다. 온몸에 문신이 있는 그는 과거 소년원에 들어갔던 적이 있고 불량한 친구들과도 어울렸다. 그에게 과거는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은 상처다. 그렇기에 마트는 그에겐 새로운 인생을 꿈꿀 기회다. 쓸쓸하고 고립된 집보다 마트가 오히려 안락하기에 그는 퇴근해도 출근하기만을 기다린다. 게다가 마트에는 지게차 모는 법도 가르쳐주는 친절한 상사 브루노가 있고 첫눈에 반한 마리온도 있다.
마리온은 묘한 매력의 여인이다.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은 휴식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 하지만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불행하다. 사정을 아는 동료 직원들은 그녀가 며칠씩 자리를 비워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안다. 마트는 그녀에게 도피처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크리스티안이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데 번듯하지만 흠결 하나 없이 깔끔한 게 사람이 사는 공간 같지 않다. 마리온은 자신에게 다정한 크리스티안에게 끌리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머뭇거린다.
브루노는 과거에 트럭 운전기사였다. 사실 이곳은 구동독 시절에 국영 트럭 회사였다. 통일이 되고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대형마트에 고용 승계가 되었다. 브루노를 비롯한 트럭 기사들은 졸지에 마트 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트럭을 몰며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이들이 지게차를 조작하며 좁고 어두운 마트 복도를 달리게 된 것이다. 브루노는 루디 등 옛 동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잘 지내는 듯했지만, 언젠가 크리스티안에게 “길을 달리던 때가 그리워.”라고 속마음을 드러냈었다. 그에게 마트는 자유를 제약하는 족쇄이고, 과거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크리스티안이 지게차 자격증도 따고 이제 어엿한 마트 직원으로 성장했다 싶은 어느 날 브루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퇴근길에 크리스티안을 집으로 초대해 맥주를 함께 마신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브루노는 크리스티안에게 집에 아내가 있는 척 거짓말을 했지만, 아마도 삶의 어느 시점엔가 아내가 그의 곁을 떠난 듯하다. 트럭 운전기사일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한 루디가 “알았던 세월이 얼만데….” 하며 한탄하는 걸 보면, 브루노는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아무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듯하다.
슬픔에 젖은 크리스티안에게 마리온은 브루노가 알려준 파도 소리를 들려준다. 지게차를 끝까지 올렸다가 내리면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커피 자판기가 놓인 휴게실에 야자수와 하늘이 그려진 휴양지 그림을 큼지막하게 걸어 놓았고, 물고기가 담긴 수족관을 ‘바다’라고 불렀다. 파도 소리와 휴양지 그림, 수족관이 이들에게는 현실을 견디는 작은 위안이었던 걸까.
독일이 통일되면서 공산주의 체제에서 갑자기 자본주의의 차가운 현실에 던져진 사람들이다. 사회에 자유가 찾아왔다지만, 현실에선 오히려 마트라는 공간에 갇힌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 브루노는 어쩌면 이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 패배감과 우울감에 젖은 사람들을 대표하는지도 모르겠다. 끝내 바다라는 이상향을 향해 현실에 마침표를 찍은 사람.
남겨진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은 브루노와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결말을 희망적이라고 봐야 할지 의문이다. 나는 언젠가 두 사람이 지게차의 파도 소리가 아닌 실제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러 가길 바란다. 브루노는 혼자였지만, 이들에겐 서로가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인 디 아일(In the Aisles)>에서 ‘복도/통로(Aisle)’는 구간과 구간을 나누면서도 통하게 하는 길이다. 사람과 사람이 독립된 존재로 자리하면서도 소통하고 만나는 곳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또한 인공 건축물의 닫힌 공간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크리스티안과 마리온이 지게차가 있는 복도를 벗어나 진짜 도로를 힘차게 달리길 바란다. 두 사람이 푸른 바다에 도달해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상상할 때, 마침내 이 영화가 희망적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