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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영화 <룸 넥스트 도어>(페드로 알모도바르, 2024) 리뷰

by 이연미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언 무어)의 출간 기념 사인회로 시작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한 친구로부터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마사(틸다 스윈튼)의 암 투병 소식을 듣는다. 이후 잉그리드는 마사의 병실에 왕래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종군기자 시절의 에피소드부터 딸과 불화하게 된 사연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세심히 들어준다. 그렇게 잔잔하고 따뜻하게 흐르던 잉그리드의 방문은 마사의 충격적인 발표와 제안으로 흔들린다. 마사는 “난 잘 죽을 권리가 있어. 존엄을 지키며 퇴장할래.” “내가 날 먼저 죽이면 암이 날 죽일 수 없지.”라고 선언하더니, 다크 웹을 통해 안락사 약을 구했다며 잉그리드에게 그 일에 동행해 달라고 부탁한다.

내 부탁은 옆방(롬 넥스트 도어)에
있어 달란 거야.


이제부터 영화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에서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죽음에 동행해 달라는 마사의 부탁은 이미 여러 번 그녀의 절친들에게 거절당한 후였다. 그녀의 고통엔 공감하지만 자살을 방조하거나 조력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게 거절의 이유였다. 평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잉그리드는 그러나 마사의 선택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승낙한다. 잉그리드는 마사가 선택한 장소에 같이 머물며 그녀 삶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다. 아침마다 마사의 방문이 혹시 닫혀있지는 않나 확인하면서 말이다. ‘닫힌 문’은 마사가 마침내 그 일을 단행했다는 둘만의 사인이다.


영화의 원작 소설 <어떻게 지내요>(시그리드 누네즈, 엘리, 2021)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나온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Quel est ton tourment)?’(p.122) 이 표현에 따르면,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다는 건 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잉그리드가 옆방(실제는 아랫방이었지만)에 머물기로 선택한 것은 마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이고 그녀를 향한 우정이자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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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와 마사가 함께 보낸 날들은 ‘분홍색 눈’이 내리던 뉴욕의 풍경처럼 순간순간이 하나의 기적이고 아름답다. 죽음이라는 어둡고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영화는 선명하고 생생한 색감으로 물들어있다. 아무리 세계가 기후 위기와 전쟁,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극우의 득세로 고통받고 있어도, 비극 속에서도 삶은 나름의 색채와 빛깔로 계속된다는 뜻일까. 잉그리드는 마사의 고통을 나눌 수는 없지만 고통받는 그녀의 곁을 고통스럽게 지켰다. ‘넌 타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나와 동행해 줬어.’ 마사는 마지막 편지에서 잉그리드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전했다.




“우리는 서로의 역사의 증인이자 세계 역사의 증인이죠.” 잉그리드 역을 맡았던 줄리언 무어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잉그리드는 마사가 들려준 이야기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그녀의 딸에게 전한다. 마사의 죽음에 동행하면서 그녀의 ‘역사의 증인’이 된 것이다. ‘세계 역사의 증인’이라는 말은 틸다 스윈튼의 인터뷰 내용으로 보충 설명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서로의 옆방(룸 넥스트 도어)에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옆방이라는 그녀의 말은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와 예루살렘이 모두 우리의 이웃이라는 이야기다.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에 동행한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이 영화는 동시대인으로서 세계 어딘가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까지 뻗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룸 넥스트 도어>는 내가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품이 넓은 영화였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기억되는 영화이다.


룸 넥스트 도어1.jpg <룸 넥스트 도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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