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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종말,
그리고 실체적 공포

폴 린치의 <예언자의 노래>(은행나무, 2024)를 읽고

by 이연미


<예언자의 노래>(폴 린치, 은행나무, 2024)라, 이 얼마나 감미로운 제목인가. 다만 책을 펼치기 전에 내가 몰랐던 건, 저 예언자가 노래한 것이 ‘신의 분노’, 즉 ‘종말’이라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의 노래는 그 어느 때나 항상 반복되던 똑같은 노래임을 깨닫는다, 칼의 도래, 불에 삼켜지는 세상, 정오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태양, 어둠에 잠긴 세상,’(p.355)


비상대권법, 공안 부대, 독재정권, 반군, 내전…, 소설이 설정한 아일랜드의 가상 상황에 기시감이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소설은 현대 사회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시대의 광포함에 휘말린 개인과 가정은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를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 과정을 숨 가쁘게 따라가다 보면(대사 구분 없이 긴장감 있게 이어지는 문장 형식), 이것이 어쩌면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우리가 경험했을 수도 있을 일들이라는 ‘실체적인 공포’가 몰려와 가슴이 서늘해진다.




소설은 전체주의 국가의 탄생이 도래한 가상의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최초의 사건은 국가에 의한 ‘비상대권법’ 발효였고, 교원 노조 부위원장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한 가정의 가장 ‘래리’가 체포 구금된다. 그에겐 출산휴가 후 이제 막 직장에 복귀한 아내 ‘아일리시’와 네 자녀가 있었고, 이들은 사건이 있기 전까진 사회의 중산층에 속하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집안에 어둠이 틈입한 어느 밤 이후 불길한 예감에 떨었던 아일리시는 이제 실종된 남편을 찾는 동시에 네 자녀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지만 아일리시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작동했던 민주주의를 향한 신뢰를 버리지 못한다. 국가가 곧 잘못을 바로잡고 삼켜버린 남편을, 아이들의 아빠를 집으로 돌려보낼 거라 믿었다. 그녀의 남은 가족을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앗아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느 시점에 그녀는 자녀들을 지킬 기회를 놓친 걸까? ‘이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듯한 이 느낌’(p.50)이 싸하게 밀려왔을 때였을까? 반대 세력을 공공연하게 ‘숙청’(p.91)하고 그녀를 비롯해 멀쩡한 사람들을 직장에서 내몰았을 때였을까? 열일곱 살에 불과한 첫째 아들 ‘마크’의 이름이 입영거부자로 신문에 실리며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때였을까?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아일리시가 놓친 탈출의 기회가 아쉬워진다. 해외에 살던 그녀의 동생은 치매 아버지를 빼내는 데 성공하지만 아일리시를 설득하진 못했다. ‘역사는 언제 떠나야 할지 몰랐던 사람들의 침묵의 기록이야’(p.127)라던 동생의 경고를 그녀는 무시했다. 아일리시가 떠나지 못했던 건 구금된 남편과 반군이 되어버린 첫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였음에도)을 그녀는 믿을 수 없었기에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남은 가족은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내전 상황에서 또 다른 아이 ‘베일리’를 참혹하게 잃고 만다.


그녀가 어리석었다고, 보호자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지금까지 독자도 ‘설마 국가가 그렇게까지 할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행보를 따라오지 않았던가. 그 낙관이 얼마나 안일하고 순진한 마음이었는지,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국가의 폭력을 목도하고 나서야 치를 떨며 각성하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아일리시는 종말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끝나는 것은 당신의 삶임을, 오로지 당신의 삶뿐임을’(p.354) 쓰라리게 깨닫는다.


아일리시가 손에 쥐고 있던 행복 가운데 결국 남은 게 얼마나 되는가 생각하면 참담하다. 내전에서 반란군이 진압되고 독재정권의 노예 외에는 살길이 없게 되어서야 아일리시는 딸 ‘몰리’와 막내 ‘벤’만을 데리고 필사적 탈출을 감행한다. ‘바다로, 우리는 바다로 가야 해, 바다가 삶이야.’(p.360)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아일리시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불확실한 희망에 기대어 보트에 오른다. 어둡고 위험한 바다는 그러나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지 않는다.




2023년 부커상을 수상한 <예언자의 노래>는 일종의 경고이다. 작가는 “시리아 난민에 대한 서구 사회의 명백한 무관심”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다고 밝혔으나 전 세계적으로 점점 심화하는 분열의 시대에 이 소설은 보편적인 공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의 종말은 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상의 종말이 당신 나라에 찾아가고 당신 동네를 방문하고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머나먼 경고, 짤막한 뉴스, 전설이 되어버린 사건들의 메아리일 뿐이다,’(p.355)


다른 지역, 다른 국가, 다른 사람에게 찾아온 종말이라고 무관심하다면, 그 종말이 내 집 문을 두드릴 때까지도 모를 수 있다. 읽는 내내 불안정한 국내 정세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편안히 잠 못 들게 한 소설이다.



KakaoTalk_20250321_130600581.jpg <예언자의 노래>(폴 린치, 은행나무, 2024)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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