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바사니의 <1943년 어느 날 밤>(문학동네, 2016)을 읽고
누가 페라라에서 1943년 12월 15일 밤을 잊을 수 있을까?(p.237)
1943년 12월 15일,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페라라에 잊지 못할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웅’, 하고 멀리서 트럭들이 다가오더니 ‘타타타’(p.239) 날카로운 기관총 일제사격 소리가 이어졌고, 열한 명의 시민이 로마대로 성벽 아래 보도 위로 쓰러졌다. 한 무리의 파시스트들이 벌인 학살극이었다.
그런데 누가 학살자였는가?(p.243)
시민들은 사건의 배후 인물로 ‘카를로 아레투시, 바로 시아구라’(p.245)를 지목했다. 하지만 당시엔 ‘공포와 연민, 미칠 것 같은 두려움’(p.242)에 사로잡힌 나머지 많은 이들이 ‘굴종’(p.243)의 자세를 취했다. 다만 ‘집단의 상상력’(p.252)은 그 끔찍한 밤에 학살 장소 맞은편 약국 위층 창문에서 가해자를 목격한 이가 있다고 믿었다.
훗날(1946년) 시아구라가 ‘명단 제공 및 총살 지휘’ 혐의로 재판정 피고인석에 끌려 나와 다른 가해자들과 똑같이 ‘모르쇠로 일관’(p.254)하며 ‘명확한 증거’(p.256)나 ‘증인’(p.258)을 요청할 때, 사람들은 아내의 도움을 받아 증인석에 앉은 약사에게서 결정적인 한 방을 기대했다.
저 위의 저 신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p.247)
그는 피노 바릴라리. 파시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약국을 물려받았고, 안나라는 방탕하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으며, 매독으로 인해 두 다리가 마비된 후 위층 창가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사람. 사건이 있던 날 밤에도 창문 너머에 목발을 짚고 서서 길가의 아내와 시선이 마주쳤던 사람. 그러나 피노의 단 한마디 증언은 모든 혁명적 심판을 무(無)로 돌려버렸다. “자고 있었어요.”(p.259)
그는 ‘두려웠을까?’(p.267) 아니면 ‘미친 걸까?’(p.267) 뭣도 모르던 열일곱 시절 로마진군을 함께 했던 시아구라에게 뒤늦은 동지애를 느꼈던 걸까? 시아구라가 피노에게 보낸 ‘찡긋’은 ‘공모의 눈짓’(p.259)이었던가. 안나는 아내인 자신에게조차 진실을 침묵하는 남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잊을 수 있을까? 잊길 바라는 것으로 다 되는가?(p.252)
이후로 피노 바릴라리는 늘 쌍안경을 들고 거리를 주시하며 "조심해요, 젊은이!" 또는 "주의해요!" 아니면 "어이!"(p.223) 하는 알 수 없는 경고를 보내곤 한다. 세월이 훌쩍 흐른 후에도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결코 잊지 못했고, 그의 집요한 경고는 마을 주민들까지 학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살해자들이 제대로 처벌을 받았다면, 그 비극적인 기억은 지워졌을지 모른다. ‘역사 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기에 가장 바람직한 마지막 기회’(p.253)를 놓친 후로 사람들은 각자의 가슴에 돌멩이를 얹은 채 살아가고 있다.
누가 대한민국에서 2024년 12월 3일 밤을 잊을 수 있을까?
계엄을 선포한 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탄핵 심판 5차 변론) 서울 항공에 전투 헬기가 뜨고 계엄군이 국회를 부수고 들어가고 선거관리위원회를 점령했지만, 이 모든 게 없던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밤을 잊지 않았다. 1943년 페라라와 달리 2024년 대한민국에선 이를 지켜본 눈이 하나가 아니다. 온갖 미디어로 전국에, 아니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과정은 조르조 바사니의 <1943년 어느 날 밤>과 비슷하게 더디게 진행되면서 ‘점진적인 무익함과 무능함의 느낌’(p.253)을 자아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피소추인은 온갖 수사가 난무하는 변론을 통해 ‘훼방과 전환의 전략’(p.255)을 쓰고 있다. ‘교묘하게 정치적 이유를 빌미로’(p.257) 자신을 내란범으로 몰고 있다며 극우 지지자들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증인들은 소설 속 피노 바릴라리와 다르다. 어떤 외부 압력에도 침묵하지 않고 꿋꿋이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결과도 다를 것이다. 분명한 건 그날 밤, 대한민국의 누구도 “자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작품 소개: 조르조 바사니의 <1943년 어느 날 밤>은 <<성벽 안에서>>(문학동네, 2016)에 수록된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발생한 실제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페라라의 소시민을 학살의 목격자로 등장시켜 파시즘 치하에서 침묵과 굴종을 선택한 시민들의 혼란하고 복잡한 심리를 그려낸다. ‘그는 정말 사건을 목격했을까?’, ‘왜 그는 증언을 포기했을까?’, ‘그의 아내는 왜 그를 떠났을까?’ 등 다양한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이미지 출처: www.ferrarainf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