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드 룸스>(파스칼 플랜트, 2023)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소재인 ‘레드 룸’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다크 웹(dark web)에서 강간, 고문, 살해, 시신 훼손 등의 잔혹한 영상(스너프 필름)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공유하고 소비하는 공간을 말한다. 범죄의 온상지라는 의혹이 일고 있지만, 아직 실체가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한다. 영화는 이 ‘레드 룸’에서 벌어진 가상의 범죄와 그 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다.
‘로즈망의 악마’라고 불리는 유력 용의자의 이름은 슈발리에로 10대 소녀 3명을 납치, 감금하고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두 개의 영상이 증거로 제출되었지만, 가해자가 복면을 쓰고 있어 슈발리에라고 특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공방이 계속된다. 세 번째 피해자의 영상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희대의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노숙까지 강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엔 켈리앤과 클레망틴 같은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클레망틴은 슈발리에의 결백을 맹목적으로 주장하는 광팬으로 '하이브리스토필리아'(흉악 범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성적 도착증)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인공 켈리앤이 왜 이 사건에 집착하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끝까지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그녀의 알 수 없는 심리다.
켈리앤은 어느 정도 사회적 입지를 다진 모델이다. 게다가 전문적인 해커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컴퓨터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높다. 우연찮게 어울리게 된 클레망틴에게 그녀는 자신의 뛰어난 포커 실력(“감정적인 상대는 벗겨 먹어야 해. 탈탈 털리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과 똑똑한 AI(‘기네비어’라고 이름 지은)를 자랑한다. 사실 켈리앤은 유출된 두 개의 영상을 이미 확보했고 슈발리에를 진범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그래서였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켈리앤이 재판장에 피해자와 똑같은 복장에 금발로 나타나 파란색 렌즈와 교정기까지 끼면서 도발한 것은. 기괴하기까지 한 이 연출은 슈발리에의 반응을 보고 이후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이 일로 그녀는 모델계에서 퇴출을 당하지만, 대신 세 번째 피해자 영상의 경매에 접속할 권한을 얻는다. 포커판에서 아슬아슬하게 따낸 거액의 암호 화폐로 경매에서 낙찰받는 순간, 켈리앤은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기뻐한다. 그녀의 본심은 대체 무엇일까?
이후 켈리앤은 세 번째 희생자의 집에 몰래 침입해 자신이 확보한 영상을 두고 나온다. 그 마지막 영상과 암호 화폐 거래 내역으로 슈발리에는 어쩔 수 없이 유죄를 인정하게 되고 사건은 해결된다. 그렇다면 켈리앤은 범죄자를 심판하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커리어와 거액의 돈까지 포기한 건가? 정의를 실현한 영웅으로 봐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결론 내리기엔 석연치 않은 지점이 있다.
희생자의 집에 갔을 때 켈리엔은 영상만 두고 나온 게 아니다. 피해자의 방에서 웃으며 셀카도 찍는다. 켈리엔을 옹호해보려고 해도 섬뜩하고 찝찝한 기분이 자꾸만 고개를 드는 이유다. 켈리앤에게 이것은 그저 하나의 게임에 불과했던 걸까? 사진은 승리자의 트로피 같은 걸까? 포커와 경매에서 다른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이겼던 것처럼, 이 사건의 관계자들 - 검사와 경찰, 피해자 가족, 심지어 슈발리에를 상대로도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싶었던 걸까?
경매에 참여할 때 켈리앤의 아이디는 ‘샬럿의 여인’이다. 그녀의 모니터 바탕화면도 같은 모티브의 그림이다. ‘샬럿의 여인’은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샬럿 탑에 갇힌 일레인은 거울로만 세상을 바라봐야 살 수 있는 저주에 걸려 있다. 어느 날 그녀는 기사 란슬롯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그를 만나기 위해 배에 몸을 싣고 카멜롯으로 향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기사가 프랑스어로 ‘슈발리에’이며, 란슬롯이 카멜롯으로 간 이유가 아서왕의 부인인 ‘기네비어’가 그리워서라는 걸 알고 나면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켈리앤은 샬럿의 여인처럼 슈발리에 혹은 그의 범죄에 매혹된 것은 맞는 듯하다. 그녀에게 거울은 PC 모니터(해커로서)와 카메라 렌즈(모델로서)였다. 샬럿의 여인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 거울이 깨지며 죽은 것처럼 재판장에서 피해자로 분장한 켈리앤의 모습이 미디어로 송출되자 모델 일이 전부 끊긴다. 일종의 사회적 죽음이다. AI 기네비어를 분노에 사로잡혀 믹서기로 갈아버린 건, “왜 유령은 거짓말을 못 할까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까.”라는 AI의 농담이 자신의 기만적인 모습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가 아니었을까? 사건이 마무리되자 켈리앤은 다크웹의 바다에 떠도는 유령처럼 사라진다.
어쩌면 켈리앤도 또 다른 방식으로 ‘레드 룸’의 영상을 소비하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영상의 잔혹성보다 접근 불가능성에 매료되어 자신의 두뇌와 자본을 모두 쏟아부어 쟁취하는 인물. 영상을 시청한 후엔 더는 가치가 없어진 그것을 베풀 듯 제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악하다”던 클레망틴의 평이 아주 틀린 건 아닌지도 모르겠다. 켈리앤을 추동한 건 정의의 실현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범죄 심리였을까? 그녀의 진실은 무엇인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아도 여전히 알 수가 없다.
파스칼 플랜트 감독의 <레드 룸스>(2023)는 ‘웰메이드 심리 스릴러물’이라고 홍보한다. 동의하는 바다. 인물의 모호한 심리와 예측할 수 없는 전개로 마지막까지 몰입해서 시청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디지털 범죄의 비인간성 등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잔인한 범죄를 이미지로 재현하지 않고 소리만으로 관객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영화는, 그것이 잘 연출된(‘웰메이드’) 영화라면, 관객의 상상과 적극적인 해석의 단계에서 완성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