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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비극 속에도 작은 것들의 신은 존재하는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문학동네, 2016)을 읽고

by 이연미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문학동네, 2016)은 도입부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 매료되어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소설 중 하나다. 아름다운 문장에 내포된 비극성이 그 실체를 조금씩 누출되는 방식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다. ‘작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큰 것’이 되어가는 걸, 소설 속 인물들처럼 맥 놓고 바라본 느낌이다. 정말 그렇다.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다.’(p.229)




여기 서로를 합쳐 ‘나’(p.13)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공유한다는 이란성 쌍둥이 라헬과 에스타펜이 있다. 두 사람은 무려 23년 만에 고향인 인도 아예메넴에서 재회한 참이다. 이들의 현재 나이는 두 사람의 어머니 암무가 세상을 떠난 서른하나, ‘늙지도 않은. 젊지도 않은. 하지만 살아도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p.14)이다. 그 사이 ‘누구에게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 ‘준비해두는 게 상책’(p.278)이라던 똑 부러지는 성격의 에스타펜은 말을 잃었다. 소설은 라헬이 그런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지켜보며 과거 자신들에게 닥쳤던 비극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모든 일은 영국에 사는 사촌 소피 몰이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아예메넴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의 가족들은(특히 라헬과 에스타펜 일곱 살 쌍둥이는) 설렘과 질투가 반반 섞인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소피 몰의 죽음은 단언컨대 사고였다. 라헬과 에스타펜이 폭풍 속에서 작은 배에 오를 때 따라나선 건 그녀였다. 그녀가 물에 빠질 줄은, 그리고 그 죽음이 일파만파 커져서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갈 줄은 그들도 몰랐다.


‘때로 죽음에 대한 기억이 죽음에 도둑맞은 삶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것은 기이하다.’(p.31) 라헬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그 기억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죽음에 도둑맞은 삶’은 이런 식이었다. 사건 이후 에스타펜은 이혼한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강제로 보내지고, 라헬은 고향에 남으며 둘은 헤어진다. 두 사람의 어머니 암무는 분노에 찬 소피 몰의 아버지 차코에 의해 쫓겨나고 지방 도시를 떠돌다 객사한다. 그리고 벨루타, 암무와 사랑을 나눴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은 벨루타. 사실 그는 소피 몰의 죽음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삶을 송두리째 도둑맞았다.


벨루타는 라헬과 에스타펜이 믿고 따랐던 ‘작은 것들의 신’(p.303)이었다. 쌍둥이의 가족이 아예메넴에서 대대로 공장을 소유한 지주였던 것에 반해, 그는 그 공장에서 일하는 불가촉천민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니 암무와 벨루타의 사랑은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암무와 벨루타가 그들을 압박하는 ‘큰 것들’(카스트제도, 성차별적인 사회, 미래의 약속...)은 잊고 본능적으로 ‘작은 것들’(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 뒤집어진 딱정벌레, 작은 물고기 한 쌍...)에 집착한 이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내일’(p.463)만을 약속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내일마저 포악한 시대에 의해 빼앗기지만.


벨루타는 누구도 어겨선 안 되는 ‘사랑의 법칙’(p.448)을 위반했기에 라헬과 에스타펜을 납치하고 소피 몰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다. 라헬과 에스타펜은 그에게 가해진 끔찍한 폭력을 목격하고도 부당한 증언을 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지어내어(“저 사람은 벨루타가 아니야”)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그 일을 잊지도 죄책감을 떨쳐내지도 못했다.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또다시 사랑의 법칙을 어기는 방식으로 서로의 ‘끔찍한 슬픔을 나눴다’(p.448)는 사실은 이 소설이 다루는 비극의 크기가 한없이 크다는 걸 느끼게 한다.




“‘큰 신’이 열풍처럼 아우성치며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자 ‘작은 신’(은밀하고 조심스러운, 사적이고 제한적인)이 스스로 상처를 지져 막고는 무감각해진 채 자신의 무모함을 비웃으며 떨어져나갔다.”(p.35) 역사와 문화, 국가와 제도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누가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규정한 제도에 의해 희생되었다. 작디작은 사람인 사회적 약자(불가촉천민, 여성, 어린이)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구원할 ‘작은 것들의 신’은 어디에 있는가? 아룬다티 로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사랑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제도 밖으로 탈출할 용기도, 오랜 상처를 치유할 희망도 지극한 사랑의 마음에서 시작한다고 말이다.

KakaoTalk_20250503_150827232.jpg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문학동네, 2016)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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