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문학과지성사, 2021)를 읽고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디디에 에리봉이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스스로 떠나온 세계인 고향 ‘랭스’로 되돌아가 자기 기원인 가족, 계급,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한 회고록이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개인사를 계급적 성찰과 연결해 서술했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 비슷하지만, 에리봉의 글은 문학과 이론을 풍부하게 참조하여 자기 서사를 보다 깊은 차원에서 파헤치려 했다는 점에서 결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저자는 후에 이 책의 글쓰기 형식을 “사회학적 자기 성찰(introspection sociologique)”(p.327)이라고 명명한다.
에리봉에게 ‘랭스’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사회적 공간으로 계급적 억압과 성적 모욕의 기억이 자리한 곳이다. 그곳에 30여 년 만에 돌아온 그는 자신의 주체화 과정이 두 가지 사회적 판결, 계급적 판결(노동자 계급)과 성적 판결(성 소수자)이 불러온 수치심에 맞서는 형태로 진행되었음을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성 소수자(게이)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글만을 써왔으며 노동자 계급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 또는 회피해 왔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저자의 이 같은 날카로운 자기 분석과 내밀한 고백으로 시작해 계급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와 성찰로 나아가다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화해의 가능성으로 끝난다.
에리봉의 길고 긴 ‘귀환’의 여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은 우리의 주체성이란 무(無)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질서가 우리에게 부과했던 정체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재발명하는’(p.30)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은 수치심을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종의 수행이며 어쩌면 ‘무한정 재착수해야 하는 과업처럼’(p.257) 끝나지 않는 일이라는 깨달음도 의미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부과된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는 그 정체성으로부터 나 자신을 재발명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가 하는 비판적 자기 성찰을 이끄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글은, 나의 ‘랭스’로 되돌아가 나 자신을 재발명하는 과정이 기술되어야 이상적이겠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직은 -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 나 자신의 수치심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듯하다. 게다가 나를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하나하나 면밀히 해체해서 재구성할 사유의 힘도 갖추지 못했다. 이번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앞만 보고 살아가는 삶에서 한 번쯤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이번 독서의 결실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어쩌면 귀환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실패의 흔적들로서만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p.333)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으며 자기 서사를 쓴다는 것의 어려움을 다시금 느꼈다. 자기기술지는 그 출발점은 당연히 자기 자신을 직면할 용기일 테지만 철저한 자기 객관화와 분석적 사고로 완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론적 바탕이 충분할수록 개인적인 고백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폭넓은 지식과 냉철한 사유를 바탕으로 정확한 문장을 끌어내는 디디에 에리봉의 글을 보며, 나는 언제쯤 이렇게 치열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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