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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의 안내서

서경식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반비, 2019)을 읽고

by 이연미


“책의 제목에 ‘인문 기행’이라는 말을 넣은 이유는 언제나 나의 여행 경험이 요즘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인문학’적인 질문과 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나의 바람은 ‘인문학’적인 정신을, 과거 그대로 복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재건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처한 위기를 자각하고 이를 뛰어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_ 서경식,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p.5

故서경식 선생의 ‘인문 기행’ 시리즈는 단순한 여행서라기보다는 여행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의 안내서에 가깝다. 여행이 유흥을 즐기거나 견문을 넓히는 것을 넘어 폭넓은 지적 사유의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서 저자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재일조선인으로서 대영제국이 지닌 ‘양면성’(p.6) - 야만적인 식민정책과 제국에서 꽃피운 문화 – 에 주목한다. 그리고 약자와 소수자, 이민자, 자살자를 향한 개인적인 관심을 반영해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과 성악가 피터 피어스, 화가 터너, 작가 버지니아 울프 등 여러 예술•문화인을 소개한다.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현지에서 잉카 쇼니바레(나이지리아계 영국작가)를 인터뷰한 일을 상세히 전하며 그의 작품에 담긴 양면성 – 아프리카적인 천 소재로 표현된 영국 제국주의 - 을 그가 사용한 용어 ‘play’를 빌려 ‘제국과 놀다/제국을 놀리다’(p.203)로 해석한 점이었다. 영국을 향한 저자의 ‘동경과 반감, 경의와 경멸’(p.5)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영국의 ‘모순으로 가득 찬 양면성’(p.6)이 ‘하이브리드(뒤섞인) 아트’(p.199)로 표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지는 글에선 쇼니바레를 향한 비판을 의식한 듯 또 다른 흑인 아티스트 잉그리드 폴라드를 소개하며, 그녀의 작품을 ‘노예 출신의 여성’(p.211) 정체성과 연결해 설명한다. 쇼니바레와 폴라드처럼 같은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도 출신 국가, 계층, 성별, 개인적 경험 등에 의해 정체성은 다양하게 구축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복잡한 정체성이 뒤얽힌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문화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타자의 시점’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Nelson’s Ship in a Bottle>, 2010 ⓒ Yinka Shonibare MBE Courtesy James Cohan
<feeling I don't belong. (...)>, 1987 ⓒ V&A collections


저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누구인 걸까’(p.211) 하는 자기 정체성의 물음을 던진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그의 인생에서 끈질기게 따라다닌 숙제인 듯하다.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으로서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의 영웅’(p.39)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부터 소수자, 패배자의 존재를 의식하며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들에 천착했다고 한다. 자신의 또 다른 저서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 ‘조선’이라는 호칭을 고른 이유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과정에서 ‘학대’(p.169)를 당한 말을 ‘민족의 총칭’(p.167)인 본래의 위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런던 대학 SOAS에서의 저자 강연에서 어느 한국인 참가자는 ‘한국’이 아닌 ‘조선’이라는 호칭을 쓴 것에 대해 불쾌감을 토로한다. 서경식 선생은 그녀가 아마도 ‘조센’이라는 말에 트라우마를 갖게 된 성장 배경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해당 에피소드는 쇼니바레와 폴라드의 대비적인 작품과도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단지 같은 민족이나 인종이라고, 혹은 같은 국가나 지역 출신이라고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으리라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개인이 평생을 통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며 구축하는 것이므로 다양성과 복잡성을 전제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은 영국이 좋은가?”(p.6)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모든 점이 좋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저 유학 시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좋았던 점과 나빴던 점을 저울질해서 내린 결론일 뿐이다. 영국에서 나는 인종 차별을 당해봤고(서구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행정 처리의 느린 속도에 답답함도 겪었고(민원이 밀려도 티-타임은 챙기는),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사람이 없어도 줄(Queue)을 서야 하는)에도 질려봤지만, 그럼에도 여러 불편함과 불쾌함을 넘어서는 수준의 교육과 문화를 누렸다. 제국이 층층이 쌓아올린 ‘지(知)의 퇴적’(p.63)이었지만, 나 개인의 성장과 성숙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정체성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영국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영국 인문 기행>은 수시로 나를 과거로 끌고 가 상념에 젖게 했다. 독서가 자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흩어졌지만, 한편으론 사유의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 서경식 선생만큼의 지적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의 영국’을 인문학적인 질문과 함께 글로 풀어보고 싶다는 의욕도 생겼다.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개인적 체험에서 보편적 성찰을 끌어내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서경식, <나의 영국 인문 기행>(반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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